우장춘 (1898-1959)은 아버지 우범선과 어머니 사카이나카 사이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 당시 조선 별기군 훈련대 대대장이었는데 명성 왕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여 우장춘을 낳았으나 우장춘이 5살이 되던 1903년 고종 황제가 보낸 자객 고영근 (독립 협회 부회장)에 의해 살해 되었다.
그후 우장춘은 가세가 기울어 한때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으나 가정형편이 나아지자 학업을 계속하여 당시 개혁파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장학금을 지원받아 1916년 도쿄 제국 대학 농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때 본인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건을 겪게 되는데 조선의 한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도중에 와세대 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인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으로 올라가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 하며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 받은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만났는데 그는 “당신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요, 매국노요! 당신 아버지 죄를 갚으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것으로 봉사하고 절대로 조선인 성씨를 바꾸지 마시오”라고 민족 의식을 심어 주었다.
우장춘은 1936년 한국인 2호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당시 학위 논문인 “배추속 식물에 관한 케놈 분석”을 통하여 기존의 야생 배추와 야생 양배추와의 자연 교잡종인 유체를 배추 속 식물인 배추와 양배추와의 교잡을 실험을 통하여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밝힌 “종의 합성 이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진화론”을 수정케 하는 획기적인 이론으로 생물체에서 다른 종 사이의 교잡은 교잡일 뿐이고 새로운 종이 될수 없다는 그간의 정설을 깨뜨렸고 식물은 진화중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교잡을 통해서 새로운 종이 태어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이는 유전학과 육종학의 획기적인 이론으로 노벨상 수상 대상이라는 파장을 일으켰다.
우장춘은 대학 졸업 후 일본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였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려 16년 동안 기수라는 하위직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자 1937년 사직하고 타키이 종묘 회사 연구원으로 입사하였으나 1945년 제 2차 대전이 끝나자 퇴사하고 실업자로 지내고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농업 생산력이 부족하여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절실했던 때였는데 당시 우장춘 박사의 실력을 인정하 한국 정부에서는 그의 환국을 추진하였다.
1947년 정부에서는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산 동래구에 한국 농업 과학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자리를 마련하고 일본에 있는 그의 가족 (어머니, 처, 아들 2, 딸3)을 위한 이적비로 100만엔 (현 10억 상당)을 주었다.
이때 일본에서는 우장춘의 한국 귀환을 막기 위해 감옥에 가두려는 술책을 펴기도 하였으나 우장춘은 한국 정부에서 보내준 한국인 신분증을 이용하여 조선인 강제 수용소로 들어가 송환선에 승선하는 방법으로 1950년 한국으로 귀환하였다.
당시 우장춘 박사의 환국과 관련하여 “우장춘은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돌아와 주어 고맙다”고 하며 전적으로 지원토록 하는 한편 6.25전쟁시에는 해군 정훈 장교로 임관시켜 연구기관에서 대체 복무토록 하였으며 후일에는 농림부 장관도 제안했다 한다.
한편 우장춘은 환국시 받은 이적비를 가족에게 주지 않고 일본의 각종 종자와 실험기구를 구입해 가지고 왔으며 귀국하여 학문적인 연구와 논문 발표보다는 실용적 연구에 주려하였는데 주로 다른 품종들 사이의 교잡 시험을 통하여 우량 1대 품종개발에 집중하였다.
그는 제주 서귀포에 1,500평 정도의 귤 재배 시험지를 만들고 일본 북 큐슈등에서 감귤을 들여와 제주도와 거제도, 욕지도 등의 환경에 맞는 감귤 개발에 성공하였고 일본 훗가이도의 감자를 들여와 바이러스에 강한 감자를 개발하여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생산토록 하였으며 무, 고추, 양파등의 1대 잡종을 잇달아 개발했는데 한 여름철의 평지 여름무, 다기능성 애호박, 당도 높은 참외, 고냉지 여름 배추, 뿌리는 무이고 잎은 배추인 무추를 개발하는 등 채소 산업의 전기를 마련하였고 당시 식재료 검사가 까다로운 미군에게 수경 재배한 채소를 납품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간 길죽한 토종 배추로 김장을 해왔으나 일본산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하여 한국 토양에 맞는 오늘날의 김장 배추 (결구 배추)를 개발하여 김치 캐비지로 명명하여 국제 학회에 등재함으로써 중국의 차이니스 캐비지와 분류하여 김치의 한국화에 공헌하였고 한국 김치가 세계 5대 장수 건강 식품에 선정되는데 기여하였다.
한편 우장춘 박사는 바둑, 화투등의 게임을 좋아했는데 단순히 즐긴것이 아니라 수학적 확률에 관심이 많았는데 화투의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책을 출간하려다 상관인 데라오 박사에게 혼난적이 있다 한다. 그는 결국 일본의 코이코이를 변형한 “고스톱”을 개발하여 한국 대중에게 소개하였다.
그리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다만 우장춘은 일본 교토 대학 키하라 히로시 박사가 만든 씨없는 수박씨를 최초로 가져와 육종학과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우면 이렇게 신기한 수박을 만들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을 뿐 씨없는 수박을 만든것이 아니라 씨없는 수박을 처음 소개한 사람입니다.
한편 우장춘은 그의 일본인 어머니의 가르침의 영향이 컸다하는데 성을 갈거나 국적을 포기치 않게하고 “너희 아버지는 조국에 큰 죄를 지었으니 이를 갚아야 한다”고 평소 이야기 했으며 우장춘은 그의 어머니가 위중하여 임종하려 출국하려 했으나 정부에서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것을 걱정하여 출국을 불허 하였다 하며 1953년 8월 그의 어머니가 작고하자 원예 시험장 강당에 빈소를 마련하고 그때 받은 조의금으로 시험장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물을 파고 화강암 표지석에 친필로 “자유천” (자애로운 어머니 젖 우물)이라 새겼으며 우장춘은 매일 아침 그 우물로 세수하고 주변을 청소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한다.
우장춘은 1959년 십이장 위궤양으로 국립 의료원에 입원했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만들려는 일념으로 농업 시험장에서 가져온 한번 심어 두번 수확하는 1식2수의 시험 볍씨를 비닐 봉지에 넣어 링겔 병과 같이 걸어놓고 관찰하였다 한다.
우장춘은 밟혀도 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금빛 찬란한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살다가 1959. 8.10일 사망하였는데 죽기전에 대한 민국 문화 포장을 받고는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 일찍 주지….”하면서 회환의 눈물을 흘렸다 하며 그의 유언은 1식 2수 볍씨를 손에 쥐고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한다니…”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 최초 사회장으로 거행하였으며 부산 동래구에 우장촌 기념관이 있고 그 앞 도로는 “우장춘 도로”로 명명되어 있으며 2016년 준공된 대전 KAIST앞 갑천을 가로지르는 카이스트교에는 우장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