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간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모든 직업은 고점과 저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직업의 귀천은 사회통념 (차별의식)에 의하여 엄연히 존재했고 특히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직업 선택이 강제 (제한) 되었기 때문에 직업의 귀천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인식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그 일을 하는 자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가치를 부여 하느냐에 따라 같은 일이라도 귀천이 갈리며 직업의 고점과 저점은 그 사회의 필요도나 문화의 발달과 사회 환경 변화등에 따라 성쇠가 결정된다.
이러한 직업과 관련해서 조선시대에는 주로 신분 (양반, 중인, 천민)에 의해서 직업이 주어졌는데 양반들은 과거, 음서, 천거, 대가 등으로 관직에 나아가지만 중인은 잡과에 합격하여 율관 (변호사역), 오작인 (검사역), 역관 (통역사역), 의관 (의사역), 기별서리 (속기사) 등 오늘날의 인기있는 직업을 갖었으며, 천민들 중 재능이 없으면 그저 몸으로 때우는 매품팔이 (대신 매 맞아 주는 사람), 착호갑사 (호랑이 잡는 무리), 대립군 (대신 군대 가는 사람) 등 위험한 일을 하고 한가지 재주라도 있으면 똥장수 (분뇨를 사고 파는 사람), 곡비 (초상집에서 상주 대신 울어주는 사람), 뗏꾼 (뗏목 장수), 백정 (소나 돼지 등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 등을 하였다.
이러한 직업 중 똥장수는 머슴 새경보다 7배나 높은 수입이 있었고 조선시대의 분뇨 처리 부서로는 천연사, 치도국이 있었으며 곡비 중에 큰소리로 오랫동안 잘 우는 사람은 인기가 높아 팔려 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쟁이”로 불리우던 사기장 (그릇빚는 장인), 침선장 (바느질 선수), 필장 (붓만드는 장인), 마경장 (거울만드는 장인), 백동 연죽장 (담뱃대: 대꼬바리-대나무대-물뿌리) 등은 어려운 일을 하였는데 현재 정부의 국가 유산 진흥원에서 관리하는 갓, 명주등 옷감, 놋쇠, 옹기, 가구장 등 문화재 “장인” 직종 만도 150여개가 되며 이런 문화재 교육기관으로는 충남 부여에 “한국 전통 문화대학”이 있다. 그리고 옛날 강나루에는 뱃사공이 있었고 전기수(실감나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등이 있었다.
한편 쟁이와 함께 “꾼”도 있었는데 조선시대 병영에는 파수꾼, 정탐꾼 (채담인)이 있었고 냇물을 업어서 건네주는 월천꾼, 사람을 태워 나르는 인력거꾼, 가마꾼이 있었으며 무거운 짐을 날라주는 지게꾼, 구루마꾼, 애경사 봉투를 전달하는 전달꾼 등 힘든 일을 하는 꾼들이 있었고 더러는 뱀을 잡는 땅꾼, 숫돼지 웅치를 없애기 위한 거세꾼 등 천대받는 꾼도 있었고 고달픈 서민과 애환을 같이했던 소리꾼, 사당패, 서커스 유랑극단, 약장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막집 뒷방의 노름꾼, 장바닥의 쓰리꾼 남봉꾼, 거간꾼, 봤다 못봤다 말씀 마시고 라고 외치던 야바위꾼 등 사기꾼과 뚜쟁이등 못된 쟁이들은 그들의 말로가 우리에게 교훈과 삶의 지혜를 주었다.
특히 넓적한 가위를 치며 구성진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모았던 엿장수며 고릿작속에 화장품, 바느질도구, 패물들을 넣어 가지고 대갓집 안방까지 출입 하면서 세상소식도 전하고 때로는 총각 처녀 중매도 섯던 방물 장수며 솥, 냄비, 고무신 등의 구멍을 떼워주던 땜쟁이며 새우젓, 석유, 바구니, 장독대 등을 지고 다니던 등짐 장수며 양지 바른 담 모퉁이에서 머리를 깍아주던 행상 이발사며 이동네 저동네 돌아 다니며 양산, 우산, 가방 등을 고쳐 주던 수리공 등 골목안 삶의 주인공들도 이미 사라졌다.
수리와 관련해서는 2017년 런던에서 매년 10월 셋째주 토요일을 “국제 수리의 날”(International Repair Day)로 정하고 고장난 물품을 수리하며 다시 쓰는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25년 10.19일 “국제 수리의 날” 첫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큰 관심을 끌은 바 있다.
그리고 “뚫어” 하고 외치며 징을 치고 다니던 방고래, 굴뚝 청소꾼이며 “퍼” 하고 외치며 다니던 분뇨 처리꾼, “뻔” 하고 외치며 삼각 신문지 원뿔에 번데기를 담아주던 번데기 장수, “찹쌀떡, 메밀묵”을 긴 겨울밤에 늘어지게 외치던 야참꾼, 새벽이면 방울만 딸랑 딸랑 치고 다니던 두부장수, “구두 닦스” 하고 다니던 구두 닦이, 한여름 인기끌었던 아이스케키 장수등 그 시절 골목의 외침소리도 끊긴지 오래되었다. 그뿐 아니라 동구 밖에 있던 물레 방앗간과 동네 가운데 있던 연자 방앗간은 유행가 가사에만 나온지 오래다, 그리고 한때 시골 부잣집하면 정미소와 양조장을 꼽았는데 그때 네발통 구루마에 방앗거리를 싣고 나르던 힘께나 쓰던 아저씨며 짐빠 자전거에 술통을 포개 싣고 달리던 술 배달꾼도 사라졌다.
또한 군복이나 담요등 군수품을 빼앗기지 않으려 찾았던 염색소, 주산(부기) 학원, 전화 교환원 학원, 직업 소개소, 서민 학생들이 드나들던 전당포, 추억과 낭만이 있던 옛 다방, 우표, 담배, 차표 팔고 공중 전화까지 놓아 인기 최고 였던 정류소 가게 방도 이제는 한가할 뿐이다.
그리고 얼마전 까지만 해도 가로등 불을 아침 저녁 키고 끄던 점화원, 교통 신호원, “오라이”로 통했던 여차장, “여보세요”로 일을 시작했던 전화 교환원, “잠깐만요” 하고 안내하던 엘리베이터 걸이며 사무실에 꽃이던 타자수, 일반직원의 상전이었던 차드사, 가리방 위에 원지를 놓고 철필로 글이나 그림을 그려 등사기로 인쇄하던 필경사도 이제 사라졌다.
한편 대문앞에서 깡통을 치며 장타령을 하던 거지며 한푼 줍슈 하던 껌팔이며 차안에서 애처롭게 외치며 물건을 팔던 고학생이며 새벽 신문을 배달하던 어린아이들도 다행히 사라졌다.
이렇게 골목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요 고달픈 삶의 외침이며 애달픈 삶의 현장들이 한 시대의 아픔이었지만 이제는 정겨운 추억의 소리가 되었는데 분명한 것은 어렵고 위험하고 힘들고 천대 받는 꾼과 쟁이와 장수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대신해 준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필자는 1950년대 공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새벽이면 어김없이 “어리 굴젓, 조개젓” 하고 독특하게 외치던 우씨 할아버지가 있었고 함석과 철사로 석쇠등 생활도구를 만들어 어깨부터 온몸에 걸고 다니며 팔던 하형이라 불리던 반공포로 아저씨며 공주 극장의 선전판을 앞뒤로 메고 시내를 돌던 샌드위치 왕눈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당시 여학생 클럽인 세븐스타, 은방울, 백장미등 회원들이 남학생 클럽인 바이킹, 알프스 회원들의 하숙집 앞에서 “맛있는 비과요, 따끈한 곰배집 빵이요, 달콤한 찹쌀떡 왔어요” 라면서 팔았던 그 유명한 칠성당, 진미당, 곰배 빵집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동안 숱한 직업을 봐왔다. 2025년 초 한국 표준 직업 분류 (통계청)에 의하면 12,300여개 (1969년 첫 조사시는 3,260개)의 직종에 약 3천만명이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직종수는 선진국에 비하면 7천여개나 적다 한다. 이런 가운데 4차 산업의 AI시대를 맞아 기존의 여러 직종은 고점과 저점을 경험하게 되고 직업에 대한 가치관도 자기 중심의 즐겁고 보람된 일로 바뀔것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