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9일은 4.19혁명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 2.28 민주운동과 대전 3.8 민주의거, 그리고 3.15 마산 의거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효시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역시 65주년을 맞았다.
당시 4.19 함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도 읍내에 있던 고등학교 6개교와 사범대학 학생들이 총궐기한 “공주 4.26 학생 의거”가 공주고등학교 3학년이 주동이 되어 전개되었다.
1960년 4월 11일(월) 저녁에 평소 자주 모여 놀던 공주 중동 소재 이영치 학우집에서 학도 호국단 대표 이철원, 이은규, 백남두, 이종복과 학내 클럽(후에 “알프스”클럽으로 명명)의 김동덕, 명기현, 오석규, 필자 등이 모여 4월 21일(장날)에 총궐기 하기로 결의하고 학내는 학도 호국단(주도: 이은규)이 맡고 다른 학교와의 연합은 학내클럽(주도: 필자)이 담당키로 하되 이은규와 필자는 수시로 만나 학내•외 준비 사항을 점검하고 추진키로 하였다.
먼저 필자를 비롯한 주동 학생들은 첫 번째 투쟁으로 시내 주요 지점에 벽보를 부착하기로 하고 1960년 4월 18일 저녁 시내를 벗어난 장기면 송산리 요꼴에 거주하는 이은규 집에 모여 저녁 식사 후 갱지에 “공주학생연합일동” 명의로 “부정선거 원흉 처단하라”“학원 자유 보장하라” “독재 정권 타도하자”등의 구호와 함께 총궐기를 독려하는 벽보 50매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벽보 부착은 다음날(4월 19일)저녁 7시에 대통교 인근에 있는 진미당 빵집에 모여 2개조로 나누어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우선 한조는 산성공원 아래 큰 길을 따라 시내 중심을 지나 제일은행 삼거리 까지 담당하고 다른 한조는 금강뚝방길을 따라 시장통을 거쳐 대통다리까지 부착한 후 진미당 빵집에 일단 모여 상황을 파악해 보고 다시 한조는 공주고 정문까지, 다른 조는 봉황동 오거리 까지 통금 전에 추가로 부착하기로 하였다. 그 후 4월 19일 저녁 진미당 주인과 잘 아는 이청규가 먼저가서 주인에게 부탁하여 풀 두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중 일행 중 한명이 부모의 반대로 불참한다하고 또 한 명으로부터 집에 형사가 왔다 갔는데 벽보 부착 계획을 알고 있더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철수하였다. 한편 다른 학교와 연합시위를 준비하던 학내 클럽은 필자가 주동이 되어 이영치, 김동덕, 오석규, 임진묵, 명기현, 박명수, 이경주, 정안모, 오병덕, 박노현, 한영희 등이 다른 학교 친구와 공주사대 선배들을 하숙집이나 중국집등에서 만나 정보를 교환하며 시위준비를 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벽보 부착을 실패한 주동학생들은 일단 시위 날짜를 다음 장날인 4월 26일 10시로 연기하였다.
그 후 4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4월 20일 등교해 보니 맹원영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정문에서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철저한 보안 속에 시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감시와 회유는 더욱 심해졌는데 집에까지 찾아와 “어제 어디서 잤느냐, 누구와 만났느냐, 데모하면 퇴학이다.”라는 등 협박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부모님들께 연락하여 부모님들의 만류가 대단했고 일부 학부모는 동반 귀향하기도 하였는데 필자의 부친(당시 공무원)도 일부러 오셔서 데모에 절대 관여하지 말고 휴교기간 동안 집에가 있자고 하셨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 필자와 이은규 등 주동 학생들은 4월 24일 꽃구경을 구실로 앵산공원에 모여 시내를 조망하며 시위 코스와 연좌 농성지점을 선정하는 등 시위 방법을 정하였다. 그리고 4월 25일 저녁에 국고개에 살던 이종복 집에 모여 시위용품을 제작하여 지하실에 모아 놓고 필자는 연합시위 명의로된 플랜카드를 가지고 와서 하숙집에 보관하였다. 한편 다른 학교와 연합시위를 준비하던 학우들도 4월 25일 밤 각자 담당 학교 책임자에게 4월 26일 10시 까지 금강 뚝방 및 백사장에 집결토록 최종 독려하였다.
드디어 4월 26일! 교내 학생을 담당한 학우들은 1교시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이청규, 이종복, 이은규는 1학년 교실에, 백남두, 양완호는 2학년 교실에, 이철원 등은 3학년 교실에 들어가 학생의거 당위성을 설명하고 운동장에 집결토록 하였다.
운동장에는 이미 와 있던 3학년 학우들에 이어1,2학년이 모여 들었다. 선생님들도 나왔으나 만류하지 않고 관망하셨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출정식을 마치고 3학년이 선두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시작했다. 데모 대열은 공주고-중동사거리(연좌농성)-시장사거리(연좌농성)-시장관통-제세당 다리-공주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구호를 제창하며 연좌 농성을 하였다.
한편 금강 백사장에 모인 데모 대열은 필자가 선두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뚝방길-시장통-세무서 앞-공주경찰서 앞에서 합류하였다. 시가지에 나온 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일부 시민들은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에 동참했으며 공주 경찰서 앞에 모인 인원은 700여명이나 되었다.
그 곳에서 경찰서장으로부터 그간 학원 사찰에 대한 사과를 받고 공주경찰서-공주대학-봉황동 오거리 방향으로 이동하려고 대오를 정리하던 중 이승만 대통령이“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15 선거는 무효화하며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등의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두 행진 계획을 취소하고 만세 삼창 후 1시경에 해산하였다.
그 후 필자는 다음에 할 일은 부상학생 치료를 위한 모금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필자는 4월 27일 우지명, 신경수와 함께 군수와 경찰서장을 방문하여 모금계획을 설명한 후 법원 앞 황태봉 대서소를 찾아가 어깨띠와 성금함에 붓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고맙게도 황선생님은 직접 글을 써 주시고 성금까지 넣어주셨다.
그 후 12시 30분에 유구에 도착하여 변두리에 밀집되어 있는 직조 공장을 찾아가 모금을 하였다. 그 날 저녁은 동급생 최왈수 집에서 자고 4월 28일 유구 장날이라서 시장에서 모금을 하고 신풍으로 이동하여 면 소재지를 돌고 공주에 왔다. 이튿날(4월 29일) 사곡, 우성면 소재지를 거쳐 상서리에서 트럭운전사의 호의로 공주에 왔다. 그리고 4월 30일 10시에 학교에서 거행된 “순국 학도 합동추도식”에 참석 후 탄천과 이인장터에서 모금 후 학교에 모금함을 전달하였다.
이상 내용은 그간 제가 간직하고 있던 빛바랜 일기책과 이은규가 기술 해준 자료와 이철원등 학우들의 진술이 큰 보탬이 되었다.
한편 공주 우국 노인회에서는 1961년 4월 19일에 공주산성공원에 “경자 4.19학생 혁명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대전 3.8 민주의거 기념관에 전시된 빛바랜 일기책]

[공주4.19 학생혁명 기념비]
그리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그해 7월 29일 실시되는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주 4.26 학생의거”를 주도했던 학우들이 주동이되어 각종 웅변대회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양완호(연사), 오병덕(총무역), 김명현(학교 밴드부 운영) 등과 “공주 고등학교 국민 계몽대”를 조직하여 “혁명 정신 받들어 바로 보고 바로 찍자”라는 구호 아래 공주 장날에는 전교생이 시가 행진을 하고 유구면 등 각면의 장날에는 순회 가두 방송을 실시 하였다.


[공주고등학교 34회 졸업 앨범 속의 계몽대 사진]
필자는 위와 같은 내용을 3.8민주의거(3.8민주의거 기념 사업회, 대전 충남 4.19 혁명동지회, 2005.8.10. 발간)와 공주문화(공주시문화원 발간. 2011.3월 호), 공주고 대전동문회보(2007.7.26.일자), 웅진문화(공주시 향토 문화연구원 발간, 제 36집) 등의 책자에 기고 한 바 있으며 그 게재문과 아카이브 구술 내용은 현 공주고교 역사관과 공주고 100년사(2022년 발행)에도 수록되어 있고 필자의 일기책 등은 대전 3.8 민주의거 기념관(2024.11.19. 개관, 총 870여평, 지하2, 지상3층)에 전시되어 있다.


끝으로 대전 3.8 민주의거 기념관 개관식에서 이양희(전 국회의원) 회장께서 4.19 혁명과 관련된 내용을 각종 교과서에 수록할 것을 촉구한 것은 큰 울림이 있었는데 필자는 관계 부처에서 4.19 혁명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학교를 “4.19 혁명 선도학교”(가칭)로 지정하고 철판에 이를 새겨 교문이나 현관에 게시케 하여 혁명 정신 계승과 자긍심을 고취토록 할 것을 제안해 봅니다. 그리고 필자도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 간의 증언과 기록을 총정리 하다보니 장황하게 되었는데 독자께서도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일생에서 중요한 고3 시기를 시위, 휴학, 혁명의 혼란 속에 아쉽게 보낸 공주고 34회 300여 동문들의 안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