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뉴스 독자 투고 (72호):  우리 야담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조선시대 출세 등용문이었던 “과거”와 관련된 내용과 함께 당시 역관들의 외국어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958년 고려 광종대 시작하여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936년간 이어온 제도로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고 양반은 모든 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중인은 잡과에만 응시할 수 있었으며 정시는 3년마다 문과 33명, 무과 28명, 잡과 28명을 뽑았으나 흉년 및 재난시에는 결시하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별시라 하여 수시로 뽑기도 하였다.

과거시험의 경쟁률은 치열했는데 조선중기 인구 1,000만 명 중 양반 비중이 10% 정도였고 이중 남성만 응시하므로 잠재적 응시 가능자는 약 50만 명이며 이중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 하면 단순 계산만 해도 40만 명 중 최종 33명을 뽑으니 1만 2천 대 1이나 된다. 

실제 1800년 3월 왕세손 순종의 책봉을 기념하는 별시에는 12명 뽑는데 21만 5,417명이 신청하여 첫날(10명 선발) 답안지 제출자 기준으로 3,861 대 1 이었고, 둘째날(2명 선발) 역시 답안지 제출자 기준 1만 6천 대 1이나 되었다.

이렇게 경쟁률이 높은 이유는 당시 관직이 500여 개로 적기도 한데다 과거급제가 양반 자제들의 유일한 출세길이고 양반 가문이라 하더라도 4대에 걸쳐 과거 급제가가  없는 가문은 상민 취급을 받게 되고 읍서 (고위직 관리의 세습), 천거 (고위직 관리의 추천), 대가 (특채) 등으로 관직에 나간다 해도 과거 급제자와 차별 대우을 받기 때문에 개인 영달은 물론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5세부터 천자문, 동문 선습을 익히고 난 후 사서 (논어·맹자·중용·대학), 삼경 (시경·서경·역경)과 춘추, 예기, 시부(한시와 문장)을 배웠다.

조선 500년 동안 과거 급제자는 1만 4천여 명이 되는데 이중 최연소자는 고종 때의 이건창 (14세 급제), 최연소 장원 급제자는 선조시 박호 (17세에 장원)이고 최연장자는 철종시 김재봉 (90세에 급제)이며 임금 중에 과거 급제자는 태종으로 고려 우왕대 10등으로 급제하였고 마지막 시험은 1894년 5.15일에 실시하였는데 이때 시험 문제는 대학의 한 구절인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법을 논하라.”였는데 이때 응시한 이승만과 김구는 낙방하였다.

과거는 초시·복시·전시로 나뉘며 초시는 지방 인구 비례에 따라 지방에서 240명을 1차 선발하고 이들은 한양에서 복시를 거쳐 33명을 선발한 후 궁궐에서 왕이 직접 책문(왕이 묻고 응시자가 답함)하여 갑과 3명 (장원, 1, 2등), 을과 10명, 병과 20명의 등수를 매기는 전시를 치루었다.

책문의 내용은 그 시대 당면 과제로 정책 아이디어 공모이기도 하였는데 “섣달 그믐밤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광해군), “술의 폐해에 대하여 논하라” (중종),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중종),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명종), “정벌이냐 친화냐” (선조), “울릉도와 독도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숙종), “도읍을 두 개 건설하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가?” (세종)등이 있었다. 여기서 2012년 7월에 출범한 세종시의 도시 이름이 수도 분산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세종이라서 특별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장원급제자는 어사화(무궁화 33송이)를 쓰고 조정에서 내준 말을 타고 하인을 거느리고 3일간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다.

한편 과거시험의 경쟁률이 높아지자 부정행위도 극심하였는데 당시 부정행위 전문 집단인 “접”이 설치고 시험 관련자 매수 등 시험장 내외의 부정행위가 늘어나자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부정행위 8가지를 선정하여 “과거 8폐”라 하여 엄하게 다스렸는데, 응시자는 사방 1.8m 간격으로 앉히고 시험장에 “금란관”(특별 감독관)을 배치하여 심하게 고개나 눈을 돌리는 응시자 답안지에는 “고반”, 옆사람과 소곤거리면 “음아”, 몰래 바꾼 답안지에는 “환관”, 일부러 답안지를 떨어트려 남이 보게 하면 “낙지”라는 도장을 답안지에 날인하였으며 답안지를 베끼다 적발되면 곤장 100대, 외부에서 유입된 종이를 이용시는 응시자격을 박탈하고 집단 부정 행위자는 유배를 보냈다.

다음 무과는 초시 (지방에서 치르는 예비 시험으로 기본 무예 기능과 체력 시험)에서 200명을 선발하여 한양에서 시행하는 복시에서 활쏘기, 기마술, 검술 등을 종합 평가 하여 28명을 선발하고 이들은 임금 앞에서 치러지는 전시를 통하여 장원과 등수가 정해졌다.

그리고 잡과는 역과 (통역), 음양과 (천문), 의과 (의술), 율과 (법률) 등 4개과 였으나 특정 시기에는 화학 (무기), 악기 (음악), 화원 (그림), 산과 (산수), 지관 (지리) 등이 추가되고 전시는 시행치 않았다.

잡과는 오늘날의 인기직으로 주로 잡과에 합격한 집안 후손들이 응시하였으며 이중 역과 (통역, 외교관, 번역 등 담당)는 특히 세습 전문직으로 일본어에 뛰어난 창녕김씨 집안에서 99명이, 몽고·여진어에 뛰어난 밀양 변씨 집안에서 106명, 중국어에 뛰어난 인동 장씨 집안에서 22명이 급제 하였다. 역관들은 잡과의 꽃으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문명국을 여행하여 근대화의 선구적 위치에 있었다.

역관은 사역원에서 관리하고 우어청에서 교육하였는데 사역원에서 매년 추천을 받아 100명을 선발하여 이들을 우어청에 입교시켜 3년간 교육을 이수하면 잡과에 응시토록 하여 최종 19명 (중국어 13, 여진어 2, 몽골어 2, 일본어 2명)을 선발하였다.

우어청의 우어는 짝을 지어 대화한다는 뜻으로 실용회화 위주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해당 외국어로만 대화를 해야 했고 (오늘날의 회화 교실, 외국어 마을과 유사) 출제는 문제은행 (오늘날의 토익시험)을 활용하였다. 이들의 교재로는 중국어 발음을 우리 문자로 표기한 “노걸대” 와 “박통사” 를, 일본어 교재는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갔다 돌아온 강우성이 지은 “청해 신어”, 몽골어는 “청해 몽어” 등을 사용하였으며 교관 중에는 귀화인도 있었다.

한편 과거시험 보러가는 것을 광명을 보러간다는 뜻의 “관광” 간다고 하였으며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엿과 베넷옷을 지참 하였고 한양 갈때 영남사람들은 문경 새재, 죽령, 추풍령을 넘어 갔으나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은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 낙엽이 되고 죽령을 넘으면 죽을 쓰거나, 쭉 미끌어진다며 멀고 험하더라도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문경 새재를 넘어갔다 한다. 그리고 선비들은 주막집 주모들이 싸준 (포장한) 비지떡을 가지고 갔는데 이것이 (값이) “싼게 비지떡이다”라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호남 사람들은 천안 삼거리 주막집에서 며칠씩 머물다 한양으로 갔는데 이곳에서 천안 삼거리의 능수버들과 천안삼거리 흥타령이 생겼다는 일화중에 유봉서라는 홀아비가 북방 변경을 지키는 수라리 명을 받고 가던 중 천안삼거리 주막집에 딸 능소를 맡기면서 지팡이 삼아 들고 왔던 버들가지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크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으며 능소는 주막집 노파의 수양딸로 자라던 16살때 전라 고부 출신 박현수가 과거 보러가던 중에 도둑에 털려 피투성이가 되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성껏 간호하던 중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박현수는 장원 급제 하여 반드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양으로 갔으며 능소는 해마다 아버지가 심어 놓은 능수버들을 꺾어 심으며 기다렸는데 몇년 후 박현수는 장원 급제 하여 천안 삼거리에 와서 변함없이 자기를 기다려준 능소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때마침 변방으로 떠난 유봉서도 부역을 마치고 천안 삼거리에 당도하여 딸 능소의 결혼 잔치에 참석케 되어 더욱 축하와 흥이 가득차 천안 삼거리 흥타령이 생겼다 한다.

끝으로 금년에는 문경새재 축제에 가서 단풍도 구경하며 옛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도 보고, 천안 삼거리 흥타령 축제에 가서 춤추며 노래도 부르고, 믿음과 기다림의 가치도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dok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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