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5일은 제 15회 “세계 한인의 날”입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재외 동포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고 재외 한인의 권익신장과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2007년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10월 5일을 “세계 한인의 날”로 제정하고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천절 (10월 3일)과 한글날 (10월9일)사이의 주간을 “재외 동포 주간”으로 정하여 관련 기념 행사를 집중적으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뜻깊은 날을 계기로 최초의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를 교민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초 미국 이민은 1903년 하와이로 떠난 102명으로 그곳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드림이 오늘날 미동포들의 성공 씨앗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던 미국 선교사 알렌 (1858-1932)에게 한국인 이민을 부탁하자 알렌은 고종을 설득하여 조정에 이민을 전담하는 “유민국”을 설치하고 이민자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 결과 1903년 1차로 102명이 출발했고, 그후 1905년 까지 7,000여명이 하와이로 이민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민자들은 하와이가 어딘지 듣지도 알지도 못했지만,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고생하느니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꿈의 땅이라 상상하고 이민을 지원했다 합니다.
처음 이민자 102명은 1903년 1월 13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9일간의 배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 도착한 이민자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속에서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하루 10시간 노동을 하였으나 일당은 겨우 70센트에 불과 했답니다.
그리고 낯선 문화차이와 언어장벽은 그들의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남녀간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것을 보고는 한국에서는 기생이나 무당들이 하는 짓으로 생각해온 그들은 기겁을 하고 놀랬답니다.
그리고 언어 장벽은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식료품 점에서 달걀을 사려고 자기 주먹에 흰수건을 둘러 씌운뒤 엉덩이에 대고 닭이 알 낳는 흉내를 내서 겨우 달걀을 샀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총각으로 이민갔기 때문에 1910년경 부터는 한국에서 신부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매자에게 사진을 보내면 한국 규수들은 그 사진만을 보고 결혼을 하였는데 이런 관계로 “사진부부”라는 말이 생겼다 합니다. 사진으로 결정된 규수는 남자 호적에 등록한 후 비자 발급을 받은 후 미 대사관에 가서 신체검사와 간단한 영어 교육울 받고 일본 요코하마 항구로 가서 다시 신체 검사를 거친후 배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마지막 신체검사와 일상 영어 시험을 봤답니다.
신체검사는 주로 기생충 검사로 엄격하게 실시하는 까닭에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바꾸어 통과하기도 했답니다 .
이렇게 사진만 보고 꿈을 안고 하와이 총각을 어렵게 찾아간 규수들 앞에 나타난 총각들은 큰 실망을 주기도 했답니다. 더러는 햇빛과 노동에 찌들려 실제 나이보다 배는 더 먹어 보였고, 양복을 빌려입고 남의집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어 보냈기 때문에 자기 집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답니다.
그러나 신부들에겐 돌아갈 돈도 없는데다 결혼을 취소하면 집안 망신이기 때문에 숙명으로 알고 악착같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일에 열중하여 정착하는데 성공하자 가족에게 송금도 하고 재산도 모아 더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해 미국 서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미서부 지역에 교민이 많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 이민 역사는 제 1기 (1940~1965년: 8.15 해방과 6.25 전쟁)를 거쳐 제 2기 (1965~1992년: 신 이민법 개정및 민족별 쿼터제 폐지)를 맞아 급증하게 되었으며 제3 기 (1992년~ 현재)를 맞았다 합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인의 특질인 인내와 끈기, 그리고 근면함이 돋보였던 최초 이민자들의 정신이 깃든 교민들께서도 새로운 용기와 더큰 희망을 안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하기 바랍니다.
끝으로 제 15회 세계 한인의 날을 계기로 축하의 인사와 함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위선양에 앞장서고 계신 750만 교민들께 박수를 보내면서 더욱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