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부모님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살던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지내는 노인들은 시골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망향의 애뜻함이 진하다고 합니다. 특히 저금나서 이룬 동네가 사라지고 고생끝에 장만한 집들이 텅텅비고 논,밭 빌려 도조 주고 경작하며 내땅 한뼘 더 장만하려고 품팔고 머슴살이 하며 마련한 땅이 놀아 나는가 하면 쌀 한톨 헛되이 버리다 시집살이 하던 그 귀한 쌀이 남아 돌고 자식은 저먹을 것은 타고 난다고 아이 많이 낳다가 산아 제한 (가족 계획)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 낳아 대를 이으려고 한지가 30년밖에 안되는데 지금은 출산율이 떨어져 50년후에는 인구가 반토막이 난다며 아이 낳으면 1억원을 준다는 등 아이많이 낳으라 야단입니다. 이에 고향을 떠나온 노인들은 이렇게 상반된 상황을 일생동안 반복해서 겪게 되자 그간의 고생과 애착이 허무 (?)했음을 느끼며 그저 먼 고향 하늘만 바라본답니다.
먼저 그 옛날 저금 (세간 나다, 따로 나다, 분가 하다의 사투리)나서 아랫집, 윗집으로 늘어나면서 안골, 밖골, 네동네, 건너 동네를 이루어 왔습니다. 당시 필자가 자랐던 공주의 한 시골 마을의 집들은 거의가 일자(-)나 기역자 (ㄱ)집이었는데 부모와 함께 안방을 쓰다가 장가들면 윗방이나 사랑방으로 가고 다음 아들이 장가들면 저금 났지요. 이때 살림이 어려운 가정의 남편은 솥단지와 간단한 세간 살이를 지게에 지고 가고 부인은 이불등 옷가지를 머리에 이고 어린 자식 등에 업고 남의집 사랑채로 저금 났으며 형편이 괜찮은 집안은 큰집 옆에 집을 지어 저금 났습니다.
이렇게 저금난 집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집과 집 사이 담장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얕았는데 이는 경계 기능 보다는 소통하기 편리하게 하였고 뒷편에는 샛문을 내었습니다.
이 샛문은 주로 아낙네들이 이용하였는데 갑자기 손님이 오거나 밥이 부족하면 옆집에서 빌려 앞치마 속에 숨겨 오거나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를 떨다 대문쪽에서 어르신 기침 소리가 나면 도망도 가고 저녁 마실도 가는 통로였습니다.
이렇게 옹기종기 집들이 빈집이 되었는데 전국적으로 농촌 빈집이 무려 6만 6,000채나 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는 “농촌 공간 재구조화 및 재생지원에 관한 법”등으로 농가 수리와 재건축 지원금을 주는가 하면 공가 철거 불이행시 강제금 부과등의 대책을 추진 중입니다.
또한 옛날에는 땅 한뙈기라도 장만하기 위해 집터나 논, 밭을 지주에게 도조 ( 생산량의 5:5에서 7:3 비율)를 주고 빌려서 경작하였습니다.
필자도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 개혁 (농지 개혁법: 1949. 6.23 국회 통과)과 소작농이 도조를 주던 것을 보고 자랐는데 여기서 “조”는 일년동안의 몫을 가을에 벼로 한번에 갚는것으로 이발소에서 주는 이발조, 나룻배를 이용한 선조, 이장, 반장에게 주는 이장조, 반장조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부가 품팔이와 머슴살이 등 고생하며 내땅을 마련하였는데 그땅에 대한 애착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일손 부족등으로 거져 줘도 경작할 사람이 없자 유휴지 경작지에 대한 직불금이니 각종 보조금 지급등 휴경지 경작 지원과 함께 휴경 과태료등의 대책이 시행 중입니다.
한편 옛날에는 쌀 한톨도 귀하게 여겼는데 밥티기 (밥알)가 수채 구멍이나 구정물에서 보이면 시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귀하던 쌀이 남아 쌀 값 안정과 생산성 보장을 위해 양곡 관리법등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자식은 집안의 울타리이고 자식 많은 것은 복이라며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특히 남아선호 사상과 의술의 발달등으로 1950년 후반기 베이비 붐을 이뤄 합계 출산율 (여성 한명이 일생 동안 낳는자 수)이 6, 7명에 달하였는데 이는 한해에 대구시 (당시 인구 80만명)가 하나씩 생기는 정도로 인구 증가율이 3%대로 폭증하자 정부에서는 1961년 11월 가족 계획 사업을 국가 시책으로 채택하고 산아 제한 사업을 본격 추진하였습니다.
주요 사업으로는 읍, 면에 전담 “가족 계획 요원”을 배치하고 마을마다 “가족 계획 어머니 회”를 운영하면서 피임기구 보급, 세금 감면, 여성 상속권 인정, 불임 시술자에 대한 공공 주택 할당, 금융 특혜, 예비군 훈련 면제, 공무원 인사 고가 반영등 혜택을 주고 관련 표어를 담배갑 등에 기재하는등 각가지 사업을 추진하다 1980년에 폐지하였는데 1966년 피임 실천율이 16%이고 출산율도 5,4 명이었던 것이 1991년에는 피임 실천율이 79%나 되고 출산율이 1.6명으로 감소함에 따라 1996년 부터는 적정인구 (4,500만 ~5,100 만명, 적정 출산율 1.8 ~2.4명)가 예상되므로 인해 1995년 산아제한 사업을 종료하였습니다.
한편 한자녀 낳기 운동과 남아 선호로 인해 남아 출생율이 높아지기 시작하며 2007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37만명이나 많았습니다. 이로인해 농촌 총각들은 동남아 여성들과 혼인하기 시작하여 2011년에는 외국 여성이 13만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출산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2005년에는 1.08명까지 하락하자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2100년에는 총 인구수가 2,410만명으로 반토막 날것으로 예측됨에 따라 정부에서는 “저 출산 고령화 사회 기본법”을 제정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대책 위원회를 두고 각 부처와 지자체, 기업체등에서는 임산부와 아동 출산에 대한 현금성 지원과 금융, 주택 지원 특혜, 육아 휴가 (남편 포함) 확대등 사회적 제도 개선과 함께 어린이 집등 보육 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실제로 2017년 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된 후 2020년에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감소 되었으며 2022년에는 출산율이 0.78명으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국 소멸론”까지 거론되는 위기를 맞고 있는데 2000년대 표어인 “아빠 혼자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 갖고 싶어요”라는 바램이 이루어 지도록 우리 모두 아이 많이 낳기에 동참 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