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발생 근원은 고대 사회에서 다른 씨족과 구분하기 위해서 지배자에게 부여하여 호칭해 온것이 성이 되었다 한다.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시대부터 부족장이나 왕족에서 시작하여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자로 이름 앞에 동계 혈족의 명칭인 성을 쓰기 시작하였다.
고조선은 시조 환에서 한씨, 발해는 시조 대조영의 대씨, 고구려는 시조 주몽의 성인 고씨등 20여개, 백제는 온조의 성인 부여씨등 20여개, 신라는 박, 석, 김의 왕족 이외 6부 촌장 (이, 최, 손, 정, 배, 설)의 성씨등 10여개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개국 공신들에게 성씨를 하사 (홍, 신, 배, 복)하기 시작하면서 확산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 성씨 자료인 세종 실록 지리지 (1454년)에는 약 250 여개, 성종시 편찬한 동국 여지 승람 (1481년)에는 277개의 성씨가 있고 이 중 130여개 성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백성”은 백가지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라는데서 유래 되었다 한다.
한편 정부 통계청에서 5년 마다 실시하는 인구, 주택, 총조사에서 1985년 부터는 15년마다 추가로 성씨별 본관 조사를 실시하는데 첫해인 1985년에는 275개의 성씨 (단성 264개, 복성 11개)가 있었으며 2000년 조사에서는 728개로 늘었는데 이중 442개는 귀화인의 성씨고 한국인 성은 286개였다. 그 후 2015년 조사세는 총 5,582개로 갑자기 증가하였는데 이 중 한자가 아닌 한글 성씨가 4,075 (한글 글자수는 총 11, 172 자임)였는데 이는 국제 결혼으로 인한 국적 취득자들과 조선족등 외국인 귀화에 의한 것이었으며 현재 한국인 성씨는 300여개 내외로 보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성씨 비율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유, 장, 임씨등 10대 성씨가 전체의 64%가 되고 20대 성씨까지 포함하면 80%나 되며 10명 이하의 소수 성씨는 무려 4,332개 (1인 성씨는 3,025개)로 나타났는데 이들 소수 성씨가 최근 국적 취득자라고 한다.
한편 성씨는 혈통, 본관은 시조의 출생지나 근거지를 말하는 것이며 항열은 시조부터 몇대 손임을 나타내는 돌림자이다.
이와 관련해서 혈통 (신분)의 구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양반 (15%), 중인 (상인 15%), 천민 (30%), 노비 (40%)의 분포를 나타냈는데 이중 노비등 절반이 성씨가 없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 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데 이어 1909년 민적법이 제정되면서 누구나 성과 본을 민적 (호적)에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 성씨가 없는 천민과 노비들은 주인 성과 본을 따르거나 임의로 성씨와 본관을 선택하여 신고하였다.
당시 이렇게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과 본을 취득하였음에도 성씨수가 증가하지 않은것으로 볼때 이들 대부분이 기존의 성씨에 편입되었기 때문이여 이로 인해 명문대가의 성씨들은 자기 조상이 양반이거나 천민일 확률은 반반이고 오히려 희성의 가문이 순수 혈통 (신분)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과 본을 취득한 사람들은 해당 족보에 올리거나 몰락한 양반의 족보와 절손된 가문의 족보에 올렸는데 이를 두고 족보를 사고 팔았다고 하였다.
한편 족보는 각 문중 종친회나 화수회에서 관리하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족보 전문 업체로는 1957년 대전에 설립된 “회상사” (창립자 박홍구, 전 국회 의장 박병석 의원 부친)로 족보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한때는 전국의 80% 이상의 족보를 편찬하였다.
또한 성씨와 관련해서 잘못된 인식의 대표적인 것이 천, 방, 지, 축, 마, 골, 피등 7개 성씨는 천민이라는 설이다. 이는 조선시대 천민 신분이었던 무당 (천), 목수 (방), 지관 (지)이나, 소 (축), 말 (마), 뼈 (골), 가죽 (피)을 다루는 백정이라고 호사가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것으로 역사 문헌에도 기록이 없고 이들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한 유명인도 있고, 개국 공신, 문무 급제자, 명문가와 혼인 (이순신 장군 처가는 방씨임) 사례등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민적법에 의하여 성씨와 본관을 택할때 천직과 관련된 성을 택할리도 없고 통계청에서 1985년 처음 실시한 성씨 조사에 축씨와 골씨는 있지도 않았다.
다음 고집이 센 성씨로는 안, 강, 최씨를 꼽고 여기에다 황씨 고집을 든다. 그 근원을 보면 안씨는 단종을 끝까지 추종하다 멸문 지화를 당한 순흥 안씨 집안을 말하며 강씨 고집은 고려말 충신 강회중이 조선 태조의 벼슬 제안을 끝까지 거절한데서 유래되었고 최씨 고집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 죽은 최영 장군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그리고 황씨 고집은 조선 영조때의 황순승에 많은 일화에서 유래되었는데 이중 그 가집에서 가까운 논을 조상 제사에 쓸 쌀을 생산하는 논으로 정해놓고 퇴비를 쓰지 않고 쌀 뜨물로만 거름을 주며 정결하게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날 하인이 그 논에서 방귀 뀌는것을 보고는 그 논물을 뺴고 새물 대기를 3년 하고 나서야 농사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와 같은 유래를 보면 굳은 절개와 예를 숭상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한편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동성 동본의 혼인 금지는 1960년 법적으로 제정되었으나 1997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2005년 폐기 되었고 현재는 8촌 까지만 금혼토록 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6촌으로 완화하려는 추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문중에서는 같은 시조에서 나뉘였다거나 문중간 역사적 반목 사건등을 이유로 동성 동본 이외 이성 동본이나 이성 이본의 경우에도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문화 유씨와 연안 이씨,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창녕 성씨와 초계 변씨등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성씨와 족보에 관한 존엄이 대단하였는데 무례한 사람을 근본 (족보)없는 사람이라 하고 중대 사안의 시비를 가리거나 큰 결심을 할때는 성씨를 걸기도 한다.
이와 같이 성씨와 관련해서 필자는 공직 재직시 교육에서 상대방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경우에는 본관이 어디고 항열이 무슨자인지 물어서 알아내고 거짓으로 저희 어머니와 성과 본이 같다는 등으로 친근감을 드러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끝으로 대전 보문산 자락에는 1997년 11월 세계 최초로 건립한 “뿌리 공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60여개 성의 문중에서 세운 성씨 조각물과 족보 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