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목동 성당은 1919년 한옥에서 시작하여 1924년 근대식 뾰족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대전시 문화재 자료 제 45호) 이는 대전 지역 첫번째 성당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목동성당 사목을 담당하던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복도와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깊은 목동성당은 일제시에는 총독부의 포교령등으로 박해를 받았고 태평양 전쟁때 (1941.12)는 일본의 적국인 캐나다 출신 신부와 수도자 7명이 연행되어 8.15 해방시까지 공주 수용소에 감금되어 사목이 중단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특히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25일만인 그해 7월 20일 인민군은 대전에 진입하여 성당 (60평)과 수도원 (지하 1, 지상 2, 90평)을 “충남도 정치 보위부”로 강점하고 충남과 인근 지역에서 체포해온 외국인, 종교인, 공무원, 경찰과 군인 가족등을 심사하여 주요인물은 이곳에 수감하고 그외 인사들은 인근에 있던 대전 형무소 (교화소로 지칭)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은 인천 상륙 작전등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신부 11명과 민간인 350여명을 그해 9월 25일 밤부터 새벽까지 학살하고 9월 26일 아침 성당을 점령한지 67일만에 도주하였습니다.
그후 성당은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6년 4개월 후인 1956년 11월 건물을 복구하고 사목을 재개하는 아픈 역사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편 한국 천주교계에서는 6.25 전쟁 당시 피난가지 않고 신자와 성당을 지키다 치명당한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와 증인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2009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하기로 결정한 후, 자료를 정리하여 2013년 3월 교황청에 홍용호 평양 주교등 80위의 시복 예비 심사를 한국에서 할수 있도록 청원 하였는데 교황청에서 이를 승인함에 따라 2015년 8월 19일 역사적인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시스코 브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예비 심사의 시작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중에는 대전 목동 성당에서 치명당한 신부 11명 (한국인 1, 외국인 10명)과 목동 성당을 지키다 납북되어 순교한 카드르 신부 (1차 대전때 장교로 복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후 한국 천주교 시복시성 특별 위원회에서는 자료와 기록, 증언, 신부가 활동한 지역과 순교지인 목동 성당등의 현장을 조사한 내용등에 대한 법정 (총 25회)을 거쳐 공식 심사를 시작한지 7년만인 지난 6월 7일 예비심사를 마치고 폐정하였습니다. 이제 교황청에서 기적 심사없이 복자 선포를 위한 재판 절차만 남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이 예비 심사 폐정 (2009년 5월 20일) 후 5년만인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교황님 주례로 거행된것을 감안할때 저는 수년내에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시복식을 주례하시고 목동 순교 복자 성지를 축복해주시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저는 그간 목동 성당의 순교 자료를 수집, 정리하면서 충격과 감격과 신비스러움을 여러번 느꼈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1999년 목동성당 80년사를 편집하던 중 “6.25전쟁때 인민군이 주둔하여 신부들과 민간인 수백명을 성당과 우물, 인근 언덕에서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이러한 사실이 각기 다른 구전과 단편적인 기록만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이 모두에게 잊혀져 가는것에 또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저는 “목동성당은 6.25 전쟁때 신부11명이 치명 순교한 순교성지이다”라는 사실 증거를 내 필생의 사명으로 삼고 이를 수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녹취하고 현장을 답사하는 등 증거를 찾던중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목동 성당이 대사를 얻기위한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됨에 따라 이곳을 방문하는 신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목동성당 수난 약사” (14p)를 발간하여 사제들의 집단 치명 순교지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전교구에서 “근・현대 순교자 관련 조사”를 선포함에 따라 그간의 기록과 제가 수집한 자료등으로 “목동 성당 박해와 성직자 순교 약사” (152p)를 발간하여 관련 성당과 언론기관에 배포하였습니다.
이 책자에는 기존의 증언과 기록이외 제가 직접 면담한 최복련 (당시34세, 목동성당 교리 교사, 정치 보위부에 6번 소환조사 받음), 최정락 (당시 10세, 학살현장 목격), 김윤배(현 83세, 순교사 연구가, 대전교구 성지및 교구사 편찬위원), 이준영 (당시 27세, 대전 형무소 형무관, 1950년 10. 3 형무소 시신 수습 책임자)의 구술서와 최익원(당시 27세, 충남 도지사 비서, 1950. 8.15 보위부에 수감된 후 9.25 학살전 석방)의 유고집 ( 그 아픈 6.25 전쟁 체험기)을 구하여 발췌한 내용을 추가로 수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크게 감격받은 사실은 제가 필생의 사명으로 삼고 증거를 수집해 오던 목동 성당에서 치명 순교한 신부들이 성인 반열에 오르는 시복예비 심사 대상에 포함된 것을 알고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그때 감격을 대전 주보에 “9월, 순교자를 위한 기도의 씨알을 품고…”제하 투고를 하였는데 마침 순교자 대축일 주보 (2015.9.20)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잊혀지지 않는 신비스런 감동입니다. 저는 목동성당에서 순교한 신부들이 시복심사 대상자가 됨에 따라 순교지인 목동성당 현장 조사에 대비하여 그간의 모든 자료를 집대성하여 “대전 목동성당 박해와 12 사제 순교사” 발간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한편으로 아쉬웠던 것이 목동 성당에 주둔했던 인민군의 실체와 이들의 만행에 관한 결정적 증거 (사진과 공공문건등)가 없는 것이였는데 이를 기적같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6.25 전쟁 당시 미 8군내 “한국 전쟁 범죄 조사단”에서 작성하고 수집한 각종 문건등이 그간 미국 국립 문서 관리청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마침 2018년 7월 여름휴가를 온 뉴욕에 사는 사위 (콜럼비아 대학 연구소장)와 딸이 이 기록물 중 “대전 목동성당 사건”을 검색, 출력, 번역하여 주었습니다. 특히 이 기록물 중에서 인민군으로부터 노획한 피묻은 “충남도 정치 보위부 출근부”를 처음 발견한 것입니다. 이때 느낀 신비로운 감등은 그간 20여년간 자료를 수집해 오면서 느꼈던 신비중 가장 감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출근부 (총 29매)에는 1950년 7월 21일부터 9월 25일까지 부장 (ㅍㄱㅅ)을 비롯한 7개과 26명이 각자 날인되어 있었는데 이로써 목동성당에 인민군 정치 보위부가 실존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 출근부 표지)
(출근부 날인 사진)
또한 그 기록물 중에는 목격자 이서용 (당시 형무관), 호순철 (당시 목동 동장), 이택우 (당시 성당 옆 거주자)등의 청취서와 안봉석 (당시 정치 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9.26일 아침 흙무덤에서 생환)의 공술서와 문병호 (인민군 포로, 당시 현장학살자)의 청취서가 있고 특히 미 8군 한국 전쟁 범죄 조사단의 조사관 팻코프 (당시 대위)가 학살 현장을 조사한 보고서와 사진등은 이들의 만행을 증거할 중요한 물증이었습니다.
(생환자 안봉석 공술서)
(팻코프의 현장 보고서)
(팻코프의 현장 사진)
이와같이 제가 평생 소명으로 삼고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1950년 7월 20일부터 목동 성당과 수도원은 인민군 충남도 정치 보위부 취조실(7실)과 수용소로 사용되었고 보위부에는 부장등 26명이 7개과에서 근무했고 인민군 1개소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신부 11명은 8월 24일부터 광주 지역 신부 3명과 천안 폴리 신부등 4명이 한방에 수용되었고 다른 방에는 강만수 신부(홍성), 몰리 마르 신부 (부여 금사리, 신부 복장인 수단을 입은 상태로 시신 발견)가 수용되었으며 9월 24일 압송된 로베르 리샤르 신부 (예산), 코르테스 신부 (당진), 장 콜랭 신부 (서산), 피에르 신부 (온양), 필립 페랭신부 (합덕)가 한방에 수용되었고 이들 신부님들은 1950년 9월 25일 밤 9시 이후부터 9월 26일 새벽 사이에 학살 되었으며, 당시 시신은 수도원 지하실 10, 성당 우물 90, 성당 마당 6, 성당언덕 240구등 총 346구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든 자료와 증거물을 정리하여 2019년 7월 9일 시복 시성 특별 위원회 위원장겸 재판장 유흥식 주교 (현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추기경)등 조사관들이 목동 성당 현장 조사를 왔을때 신부들의 치명 상황을 직접 설명한 후 현장을 안내했습니다.
(법정 조사관 일행)
( 필자 증언)
(현장을 설명하는 필자)
그후 관련 자료와 증거물을 공증관에게 전달하였는데 이때 공증관은 “결국 평신도가 해냈군요”라고 하면서 인정감을 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2019넌 목동 성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유흥식 주교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저서- 대전 목동성당 박해와 12 사제 순교사)
(*사진상: 1950년대 목동성당 전경, 사진하: 현재 목동성당 전경)
(주교님의 감사패 수여)
끝으로 프란시스코 한국 관구 창설자이며 6.25 전쟁 당시 파괴된 성당과 수도원을 복구한 쥐스땡 마리 벨로즈 신부는 그의 저서 “대전 목동 한밭 목자의 마을”에서 “ 목동 언덕은 우리 구원자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골고타 언덕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그간 제시한 증거들과 제가 소장하고 있는 26종의 자료들로 발간한 책들이 이곳 목동 성당에서 순교한 11명의 신부들이 시복 시성되는데 기여하고 이곳이 한국의 골고타로 새로운 세계적 성지가 되는 초석이 되고 이곳을 찾는 전세계 순례자들에게는 순교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목동 선당은 이들을 기억하고 증거하며 희망을 갖게하는 성지가 되길 기원합니다.
한편 저는 앞으로 사제 11명이 치명당한 9월 25일이 81위의 복자 순교자들 기념일이 되고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현양을 위하여 “순교자의 밤”을 공식 제정할 것을 제안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