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뉴스 독자 투고 (제 55호): 우리는 단군 시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으로써 배달 민족, 백의 민족, 단일 민족이라 해왔는데 이들 호칭의 유래와 함께 불편한 진실을 온고지신의 마음에서 살펴 본 다음 반도 삼천리와 지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나라의 구성원을 흔히 겨레, 종족, 민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같은듯 다른데 겨레나 종족은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씨족을 의미하는 말로 혈통을 중요시하는데 민족은 언어, 영토, 역사, 문화등의 객관주의적 공유를 중요시 한다.

우리민족은 그간 한민족, 배달 민족, 단일 민족이라고 해왔는데 이는 공동의 조상을 가진 종족이며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뜻으로 외국인이 귀화하면 한국인이 되어도 한민족이 되지는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교과서에서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 일상에서도 잊혀지고 있으나 온고지신의 마음에서 그 유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한민족의 한(韓)자는 시조인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환”에서 “한”으로, 삼한의 “한”에서 유래되었고, 한민족은 한 조상에서 시작하여 같은 말을 쓰고 한곳에서 함께 살아오면서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의 한(漢) 민족과는 별개로 구분된다. 그래서 그간 사대주의에서 잘못 표기된 한의학, 한복등의 漢자는 韓자로 바꾸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한강은 漢강으로 쓰고 있는데 韓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음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상고시대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겨레라는 뜻으로 밝음을 뜻하는 “밝”자와 땅을 의미하는 “달”이 합쳐서 밝달이 되고 그후 박달에서 배달로 변했다는 설과 옛날 박달 나무로 제단을 만들었는데 이 “박”자와 단군의 “단”자를 합하여 박단이 되고 후에 배달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배달은 택배 업체로 더 알려져 있다.

한편 우리 민족은 “백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 유래는 옛부터 한 민족의 빛과 태양을 숭상하는 제천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색은 순결, 청순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흰옷 선호에는 비움과 절제와 순수함을 추구하는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렇게 흰옷을 숭상하고 흰옷을 즐겨입는 백의 호상 전통이 있었기에 “백의 민족”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민족 정기 말살 차원에서 조선은 염색 기술 낙후, 경제권 궁핍, 슬픔의 민족, 상복의 일상화, 국가적 백의 장려등에서 흰옷을 입는다고 왜곡하였다. 

이에 우리 학자들은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염료를 사용해 왔고 경제적 궁핍이라 하나 오히려 백의가 비 경제적이고 슬픈 민족이 아니라 흥과 끼가 있는 민족이고 나라에서 백의를 장려한게 아니라 국가 금령에 백의 착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반박 하였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상징으로 백의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흰옷을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금지 시키고 장날에는 흰옷에 먹물을 뿌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던 백의는 6.25 전쟁 이후 급격히 사라지고 현재는 상복으로 겨우 이어지고 있다.

다음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민족은 시조 단군의 자손으로 모국어인 한국어를 사용하며 같은 영토에서 5천년이상 함께 살아오면서 문화나 역사를 공유해 왔기 때문에 단일 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 민족의 기원에 관한 유전학적 ( DNA, 골격 등), 고고학적 (토기, 석기, 청동기 시대 유물 등), 역사학적 (역사서와 사료등)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여러 뿌리 (북부 시베리아, 중국 남부, 동아시아 등)에서 유래한 인구 집단들이 결합해서 형성된 다기원적 민족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이중에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700여년전인 BC 3천년경 중국 황화 문명이 시작 되었을 당시 전세계 인구는 1,400 만명이었고 이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서인 조선 성종시 발간된 동국 여지 승람 (1481년)에는 한국 성씨는 277개이나 이 중 130여개는 중국등 인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미 고려시대 예성강 벽란도가 국제항이 되면서 원나라 등 중국계와 동남아의 이슬람 국 사람들이 개성 인근에 수만명 거주했다는 기록과 함께 세종 25년 (1443년)에 대마도와 조약을 맺고 3개항 (부산, 울산, 진해)을 개방함에 따라 이 일대 해안선에서 외국인들이 배를 제조하여 어업에 종사했고 숙종 (1698년)시 왜관에는 일본인 800여명이 거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여진족으로 구성된 군인들이 조선 건국에 참여했고 임진 왜란때 조선에 투항한 왜군 조총 부대와 네델란드 대포 부대등 외인 부대 군인들의 후손과 외국인 의사, 조선 및 화약 기술자등이 관직을 하사받아 거주했다는 많은 기록들은 단일 민족이라는 주장에 불편한 진실이 되고 있다.

또한 “반도 삼천리” 유래는 우리나라가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에 접해 있고 삼면이 바라도 둘러싸인 반도로써 최북단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리)과 최남단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과의 직선 거리는 1, 014 km (약 2,536리), 제주도 마라도 남쪽 끝까지는 1,146 km (약 2,865리)이기 때문에 반도 삼천리라 하였다.

한편 지형과 관련해서는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을 향하여 절하는 형상이라 하고 일제시에는 토끼 모양이라 했다.  이에 우리측에서는 호랑이 형상이라며 그 꼬리는 포항의 호미(호랑이 꼬리)곶이라 했다.  그리고 지도를 꺼꾸로 하면 일본은 우리나라를 호위하고 우리나라는 중국을 움켜쥐고 있는 형국이라 했다.

그리고 지형이 S자형인데 우리 나라 대표적인 시멘트 업체인 한일 시멘트 회사 로고는 여기서 따온 것이라 하며 한때 일부 인터넷에서는 “나팔 부는 천사” 모양이라고 하였다.  어찌되었던 대륙에 산다고 마음이 넓은 것도 아니고 반도에서 산다고 마음이 좁은 것도 아니고 대국에 절하는 모습이니 중국을 섬겨야 하고 토끼를 닮았으니 사냥감이고 호랑이를 닮았으니 기상이 높다는 것은 아전인수격 이야기일 뿐이라 하겠다.

끝으로 우리의 유래나 역사등 객관적 사실은 정사로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우리 민족의 우수한 본성등 주관적인 것과 찬란한 역사 문화를 이룩한 자부심은 이어가야 할것이다.

dok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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