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은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동안 땅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으로 초기 신발은 갈대, 나무껍질, 가죽등 구하기 쉬운것 부터 시작해서 짚신, 게다, 고무신, 운동화, 구두등으로 발전 하였는데 이제는 다양한 기능화와 함께 패션의 목적으로 발달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신발과 관련된 우리나라 대표적인 동화와 동요인 “콩쥐 팥쥐”에서 콩쥐가 선녀가 준 꽃신으로 왕자를 만난 이야기를 듣고,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는 오빠를 기다리는 “오빠 생각”을 부르며 자랐습니다.
한편 신발은 어릴적 최고의 선물로 신발사러 장에가신 어머니를 동구밖까지 마중갔고, 새신발을 머리맡에 놓고 자기도 했으며 신발을 신고가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벗어들고 맨발로 가기도 했지요. 군대가서는 훈련화와 영내화를 서로 훔쳐가고 군화 수입 불량으로 외출이 금지되고 고향 생각 잊으려고 군화에 광을 내던 일이며 혹시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을까 (변심) 애를 태우기도 했지요.
또한 신발은 유행 따라서 멋쟁이들이 백구두를 신고 다방가를 드나들고 대학생들은 헌군화를 신고 낭만을 즐기기도 하였답니다. 그리고 옛날 중매쟁이들이 자주 쓰던 “헌신짝도 짝이 있다”는 말에 당시 노총가들이 위안을 삼기도 하고, 요긴하게 쓰다가 미련없이 버리는 것을 “헌신짝 버리듯 한다”고 쓸모없는 것을 버리는 대명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선거때에는 표를 사는 물건이 되여 고무신을 받은 동네 사람들이 10문이여 11문이여 하면서 서로 교환 하여 신었던 이른바 “고무신 선거”라는 말을 생기게도 하였답니다.
이렇게 사연도 많고 추억이 많은 신발 중에 “짚신”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신발”이었습니다. 옛날 먼길을 떠날때에는 봇짐에 오합혜와 십합혜의 두종류의 짚신을 넣고 갔는데 십합혜는 씨줄 10개로 촘촘하게 짠 신발이고 오합혜는 5개의 씨줄로 엉성하게 짠 신발로 마을길을 걸을 때는 십합혜를 신고 가다가 산길이 나오면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다 밟혀 죽지 않도록 오합혜로 바꾸어 신었는데 이렇게 벌레의 생명까지도 소중이 여기는 한 민족의 감성이 어린것이 짚신이었습니다.
다음은 일제시대부터 유행하던 “게다”인데 게다는 요사이 슬리퍼 같이 발모양의 나무판자의 양볼에 끈을 단것도 있고 엄지 발가락 사이에 구멍을 뚫어 양볼쪽으로 끈을 단것등 두가지가 있는데 게다는 잘 넘어지고 소음도 나고 비오는 날에는 바지 뒷쪽이나 등까지 흙탕물이 튀었고 신고 달리기도 어려웠으며 끈이 자주 떨어져 아이들은 들고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신발중에는 역시 고무신이 “국민 신발”이었습니다. 고무신은 가볍고 편안하고 비올때 젖지 않고 (방수) 추울때 보온이 되고 세척이 용이하여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무신은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신기 시작하여 유행된 것이므로 흔하다고 얕보아서는 안되고 고무신은 하얀색과 검은색이 있는데 흰색은 더 비싸고 주로 집안 어른이나 부유층이 사용했습니다.
고무신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6년경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1960대 구두와 운동화등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주류를 이루었고 최초의 고무신은 1919년에 설립된 대륙 고무 주식회사에서 생산한 경표, 상표, 대륙표등이 있었는데 1937년 중일 전쟁으로 물자가 귀해지자 일본 총독부가 생산을 중단시켰습니다.
그후 1947년 국제 상사가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대표적인 브랜드는 “왕자표” 고무신이었으며 그외 말표, 범표, 기차표, 타이어표등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상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무신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찢어지면 당연히 기워서 신었고 꿰매는 것으로 안되면 장에 가서 때워서 신었지요.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서야 마지막으로 엿장수 손에 넘겨졌습니다.
한편 당시 고무신은 아이들에게 좋은 장난감이였는데 뒤축을 앞쪽에 구겨 놓고 밀고 다니면 그게 자동차였고 개미나 딱정벌레를 넣어 냇물에 띄우면 배가 되었으며 냇가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으면 신발안에 담아 놓고, 꽃속의 벌을 신발로 덮쳐서 뱅뱅 돌리기도 했으며 “신발치기”라는 놀이도 하였는데 어쩌다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면 칠칠치 못한 녀석이라고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무신은 동일한 디자인으로 크기만 다르게 찍어내기 때문에 네것 내것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학교 신발장앞에서는 내신이니 네신이니 다투기도 하는 등 웃지 못할일이 자주 생기자 자기 신발에 표시를 하였는데 불에 달군 송곳으로 작은 구멍을 내거나 실로 글자를 꿰매여 표시하기도 하였으며 양심 불량한 사람은 헌신을 신고 사람이 많이 모인곳에 가서 새고무신을 신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합니다.
이렇듯 신발에 얽힌 사연도 많지만 지금은 편하고 예쁜 신발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고무신을 새삼 그리워 할일이야 있을까마는 그래도 붕어를 잡는다고 냇물을 막고 고무신으로 물을 퍼낼때의 그 신나던 손놀림이며 친구들과 길게 뻗은 논둑길을 내달릴때는 벗겨지기 일수여서 아예 손에 쥐거나 허리춤에 매달았던 추억이 새롭고 새신을 신고 싶어 일부러 신고 있던 신에 흠집을 내고 학생화가 신고 싶어 부모님께 책산다고 거짓말 했던 일들이 나이가 들수록 짠한 회환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