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여 3년동안 치열한 전투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된 후 68년간 남북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 3년간의 전투중에 UN 16개국이 전투에 직접 참전하고 6개국이 의료등 비 전투 요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중 미군은 연인원 178만 9,000여명이 참전하여 애석하게도 3만 3,686명이 사망하고 9만 2,134명이 부상당했으며 3,737명이 실종되었고, 4,439명이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전투를 미국 학자들 간에는 “Forgotten War (잊어버린 전쟁)”이라고 한다는데 이는 이길수 있는 전쟁을 휴전이라는 명칭으로 중지한 미국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기에 애써 외면하려는 미국인의 관점이 반영된 표현인듯 합니다.
그러나 6.25 전쟁은 잊을 망정 참전국에 대한 고마움과 참전 무훈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특히 한국전선에서 전사한 그 숭고한 정신이 헛되지 않게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계승”하며 그 공을 “”현양”해야 할것입니다.
지난 6.23일 한국의 작은 도시 공주의 명학 장학회 (이사장: 최석원, 전 공주대 총장)에서는 6.25 참전국 유학생에게 장학금과 기념품을 전달했다는 기사는 근래 없던 일로 저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재미 교민들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장성들의 아들 142명중 35명이 이국땅 한국에서 전사하였는데 오늘날 사용하는 “빽”이라는 말이 당시 군 사회에서부터 생겼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를 감동케 하였는바 그 중 일부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초대 미 8군 사령관 휠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이야기로 워커 사령관은 그의 외아들 워커 대위에게 한국의 은성 무공 훈장을 전달하고 그곳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로 가던중 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 지점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Walker Line”이라 불릴 정도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여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 시켰습니다.
그는 낙동강 전투에서 1950년 7월 29일 절대절명의 상황을 맞아 그의 별명인 “불독”처럼 무섭게,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라 (Stand Or Di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부자가 4성 장군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광진구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워커힐 호텔”이 있고 이곳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초대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에 이어 2대 릿지 웨이 장군, 그리고 3대 벤프리트 장군 아들의 이야기로 그의 아들 지미 벤 프리트 공군 중위는 아버지가 참전하고 있는 한국 전쟁에 지원하여 주한 미 공군 전투 비행단 소속으로 1952년 4월 2일 새벽에 적지인 압록강 지역에 출격하였으나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때 벤 프리트 사령관은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위험하니 즉시 중단하라”는 용단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그가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그해 12월 23일 아이젠 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 전선을 방문하여 벤프리트 사령관에게 “내 아들 존 아이젠 하워 소령은 어디서 근무 하느냐?”고 묻고는 내아들이 전투중 전사하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 들이겠다. 그러나 내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 대통령 아들을 가지고 흥정하려 할것이고 나는 그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이니 포로가 되지 않도록만 해달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크라크 대위는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 하면서 세번이나 부상당한 후 전역하였으나 치료중 순직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한국 전쟁당시 미 24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갔다가 길을 잃어 헤매다 포로가 된후 휴전 협정에 의한 포로 교환시 북한군 총좌 리학구와 맞교환 석방되었습니다.
딘 사단장이 행방불명 되었을 당시 미군에서는 1950년 7월 19일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 기관사 김재현과 부기관사 2명으로 하여금 미 특공대원 30명을 기차에 태우고 대전역에 침투토록 하였으나 수색에 실패하고 충북 옥천역으로 귀환중 북한군에 의하여 전원 순직하였습니다.
당시 그 기차 운행을 책임지었던 김재현 기관사는 2012년 한국인 최초로 미 국방부로 부터 최고 훈격인 특별공로 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기념 동상은 대전역 동 광장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저의 며느리 친할아버지라서 감회가 남다르기도 합니다.
다음은 한국 전쟁의 영웅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1880.1.16~1964.4.5)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미국 육군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차 대전에 참전해서는 무공훈장을 15개나 받아 미국 내 신기록을 수립했으며 최연소 별을 달고 최연소 사단장의 기록을 세운 장군으로 1945년 9월 미주리 함상에서 일본 항복 문서를 직접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맥아더 유엔군 총 사령관은 1950년 9월 미조정에서도 승리 확률이 5000:1이라고 했던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 30만명의 인해전술로 “1.4 후퇴”라는 제 2의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중국 본토 폭격 주장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거부됨으로서 종국에는 “휴전”이 되어 지금까지 대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그의 퇴임식 (1951년 4월 19일)에서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현재 그의 동상은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는 인천 자유 공원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민들께서도 한번쯤 읽어 보았음직한 “하나님. 저의 자식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로 시작되는 맥아더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문”을 한번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벤 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벤프리트 공군 중위가 한국전에 참전키 위해 떠나면서 그의 어머니꼐 보낸 편지로 이글을 맺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비행 훈련을 마치고 B-26 폭격기를 조정합니다. 기수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그리고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지금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한국에 갑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나의 승무원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중에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