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면 떠오르는 4.19혁명!
그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의 “2.28 민주운동”은 우리나라 최초 민주화 운동이 되었고 대전의 “3.8 민주의거”는 두 번째 민주화 운동이 되었으며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울려 퍼진 4.19 함성은 “4.26 학생의거”에 이어 4.19 희생자에 대한 모금 운동과 4.19 혁명으로 인해 실시되는 7.29 참의원∙민의원 선거를 위한 “공주고 계몽대”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 몸부림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
4.19 혁명 당시 널리 불렸던 노래가 새롭게 생각이 납니다. 먼저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4.19 혁명 당시 희생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호에서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 “2.28 민주운동”과 대전의 “3.8 민주의거”에 대해서 개관한 다음, 교육의 도시 공주에서 있었던 “4.26 학생의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되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독재와 부패가 극에 달한 가운데 각종 관권, 부정 선거를 획책 하였는데 학생들이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참석치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등교시키는 등 학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함에 따라 급기야 2월 28일 오후 1시 경북고등학교가 주동이 되어 대구 지역 고교생 1,000여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독재 정권 타도 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 하였다. 이어 3월 8일에는 대전 고등학교가 주동이 되어 대전 지역 8개 고등학생 1,6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4.19 혁명은 1973년에, 3.15 마산의거는 2010년에 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고 법정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으나, 대구의 2.28 민주운동은 58년 뒤인 2018년 2월 6일에, 대전의 3.8 민주의거는 같은 해 11월 2일에 각각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고 법정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6개 민주화 운동 중 2.28 민주운동이 한국 최초 민주화 운동으로, 3.8 민주의거는 두 번째 민주화 운동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한편 교육의 도시 공주읍에는 당시 고등학교 6개교와 공주사범 대학이 있었는데 4.19 함성이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자,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도 공주 고등학교 3학년이 주동이 되어 총궐기 하였다. 우선 시위 주동자들은 공주 장날인 4월 21일 10시에 총궐기하기로 하고 학내는 학도 호국단에서 담당하고 다른 학교와의 연합은 학교 내 클럽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기로 하였다.
먼저 주동학생들은 첫 번째 투쟁으로 시내 주요지점에 벽보를 부착하기로 하고 1960년 4월 18일 저녁 시내 중심을 벗어난 장기면 송산리 요꼴에 거주하는 이은규 집에 모여 저녁 식사 후 갱지에 “공주 학생 연합 일동” 명의로 “부정 선거 원흉 처단 하라”, “학원 자유 보장 하라”, “독재 정권 타도 하자” 등의 구호와 총궐기를 독려하는 벽보 50매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벽보 부착은 다음날(4월19일) 저녁 7시에 대통교 인근에 있는 진미당 빵집에 모여 2개 조로 나누어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우선 이철원, 이상빈, 백남두가 한 조가 되어 산성공원 아래 큰 길을 따라 시내 중심지를 지나 제일은행(현 국민도서) 삼거리까지 담당하고 이청규, 이은규, 이종복은 금강 뚝방 길을 따라 시장을 거쳐 대통다리까지 부착 한 후, 진미당에 일단 모여 상황을 파악해 보고, 다시 한 조는 공주고 정문까지, 다른 조는 봉황동 오거리까지 통금 전에 추가로 부착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후 4월 19일 저녁 진미당 주인과 잘 아는 이청규는 먼저 도착하여 주인에게 부탁하여 풀 두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중, 일행 중 한 명이 부모의 반대로 불참하고 또 한명은 집에 형사가 왔다 갔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철수 하였다.
한편 다른 학교와 연합 시위를 주동하던 학내 클럽의 이영치, 김동덕, 오석규, 임진묵, 명기현, 박명수, 이경주, 양재헌 오병덕, 박노현, 한영희 등과 필자는 다른 학교 친구와 공주사대 선배들을 하숙집이나 중국집에서 만나 정보를 교환하며 시위 준비를 하였다.
이런 상황 하에서 벽보 부착에 실패한 주동 학생들은 일단 시위 날짜를 다음 공주 장날인 4월 26일 10시로 연기하였다.
그 후 4월 19일에는 계엄령이 선포 되었는데 4월 20일 등교해 보니, 맹원영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정문에서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철저한 보안 속에 시위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들의 감시와 회유는 더욱 심해졌는데, 집에 까지 찾아와 “어제 어디서 잤느냐, 누구와 만났느냐, 데모하면 퇴학이다.”라는 등 협박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부모님들께 연락하여 부모님들이 “절대 데모에 참여하지 말라.”는 만류가 대단했고, 일부 학부모는 동반 귀향 하기도 하였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 주동 학생들은 4월 24일 꽃구경을 구실로 앵산공원에 모여 각 학년 분담과 시위 코스를 정하였다. 그리고 4월 25일 저녁에 국고개에 살던 이종복 집에 모여 시위 용품들을 지하실에 모아 놓고 운반 계획 등을 최종 점검하였다.
한편 다른 학교와 연합 시위를 준비하던 학우들도 4월 25일 밤 각자 연락망을 통하여 4월 26일 10시에 금강 뚝방 밑 백사장에 집결토록 최종 독려 하였다.
드디어 4월 26일! 교내 시위를 담당한 학우들은 1교시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백남두, 양완호는 2학년 교실에, 이청규, 이종복, 이은규는 1학년 교실에, 이철원, 이상빈 등은 3학년 교실에 들어가 학생의거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명하고 운동장에 집결토록 하였다.
운동장에는 이미 와 있던 3학년 학우들에 이어 1,2학년이 모여들었다. 선생님들도 나왔으나 만류하지 않고 관망하셨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후, 출정식을 마치고 3학년이 선두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시작하였다.
데모 대열은 공주고-중동사거리-시장사거리-시장관통-제세당다리-공주극장 옆 길-공주 경찰서(현 공주시 청소년 센터) 앞에 집결하여 구호를 제창하며 연좌시위를 하였다.
한편 금강 백사장에 모인 데모 대열은 뚝방길과 시장을 통과하여 공주 경찰서 앞에서 합류 하였다.
시가지에 나온 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일부 시민들은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외치며 행진에 동참하였으며 공주 경찰서 앞에 모인 인원은 700여명이나 되었다.
그 곳에서 경찰서장으로부터 그 간 학원 사찰에 대한 사과를 받고 공주 경찰서-공주대학-봉황동 오거리 방향으로 이동하려고 대오를 정리하던 중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15 선거는 무효화하며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등의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두 행진 계획을 취소하고 만세 삼창 후 1시경 해산하였다.
그 후 우리는 다음에 할 일은 부상 학생 치료를 위한 모금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필자는 4월 27일 우지명, 신경수와 함께 법원 앞 황태봉 대서소를 찾아가 어깨띠와 성금함에 붓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고맙게도 황 선생님은 직접 글을 써 주시고 성금까지 넣어 주셨다.
그 후 군수와 경찰서장을 방문한 후 당일 12시 30분에 유구에 도착하여 변두리에 밀집되어 있는 직조 공장을 찾아가 모금을 하였다. 그 날 저녁은 동급생 최왈수 집에서 자고 4월 28일이 유구 장날이라서 시장에서 모금을 하고 신풍으로 이동하여 면 소재지를 돌고 공주에 왔다. 이튿날(4월 29일) 사곡, 우성 면소재지를 거쳐 상서리에서 트럭 운전사의 호의로 공주에 왔다. 그리고 4월 30일 10시에 학교에서 개최된 “순국 학도 합동 추도식”에 참석 후 탄천과 이인 장터에서 모금 후 학교에 모금함을 전달하였다.
이상 내용은 그 간 제가 간직하고 있던 빛바랜 일기책과 이은규가 기술해 준 내용이 큰 보탬이 되었다. 한편 공주 우국 노인회에서는 1961년 4월 19일에 공주 산성 공원에 “경자 4.19 학생 혁명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 기념비는 1980년 공산성 문화재 발굴 공사로 인해 3.1 공원으로 이전 되었으나, 지금은 공주 신관동 금강변 도로 한 켠에서 쓸쓸이 그때를 기억케 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서울 대학교 학생들은 “국민계몽대”를 조직하였는데 그 해 7월 29일 실시되는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공주에서는 공주고등학교가 4.26 학생의거를 주도했던 학생과 각종 웅변대회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양완호(연사역), 오병덕(총무역), 김명현(학교밴드부 운영) 등이 “공주고등학교 계몽대”를 조직하여 “혁명정신 받들어 바로 보고 바로 찍자.”는 구호 아래 공주 장날에는 전교생이 참석하여 시가 행진을 하고 유구면 등 각 면의 장날에는 순회 가두 방송을 실시하였다.
끝으로 필자는 위와 같은 내용을 3.8 민주의거(2005.8.10. 발행), 공주문화(2011. 3월호), 공주고 대전 동문회보(2007.7.26.) 등에 기고 한 바 있고, 그 게재문은 현재 공주고교 역사관에 있으며 일부 내용은 공주고 100년사(2022년 발행)에 수록되어 있다.
이제 4.19혁명 63주년을 맞아 제가 마지막으로 빠짐없이 총정리하여 남겨 놓는 것이 먼저 간 학우들에 대한 도리라 생각 하고 쓰다 보니 두서 없이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을 독자들께서는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생에서 중요한 고3 시기를 시위, 휴교 등 혁명의 혼란 속에 아쉽게 보낸 공주고 34회 300여 동문들의 안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