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순은 1872년 5월 22일 충남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서 부 김현종과 밀양 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3살때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여 공주 시장에서 국밥 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10대 초반에 공주에 있던 충청 감영의 사또방을 청소하는 관노가 되어 사또의 요강을 하루에 10여번씩 깨끗이 닦고 겨울에는 놋쇠 요강을 자기품에 안고 있다가 따뜻해 지면 방에 넣는가 하면 새벽에도 내아 (사또 거소) 주변의 눈을 치우는 등 성실했고 월급을 타면 상전에게 상납하는 등의 처세로 얼마후 충청 감영 전옥 (감옥소)의 사환이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어느날 도박범을 잡기 위해 현장에 가던 중 시장 잡배들에게 잡혀 있는 여인을 구해 주었는데 그 여인이 의남매를 맺자고 하여 동생이 되었고 그 여인이 얼마후 충청 감사의 첩이 되었다. 그 여인의 후원으로 감옥소 사환에서 총순 (말단 죄수 감시원)이 된 후 그의 나이 28세때인 1899년 감영의 아전이 되어 천민의 신분을 벗어났고 충청 감영의 창고지기가 되었다.
그때 어느날 허름한 선비가 찾아 왔는데 그 선비는 충청 감사와는 어릴때 친구로써 자기딸 혼수감을 얻으러 왔으나 감사를 만나지 못하고 낙담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급히 창고로 가서 비단과 엽전등을 가져와 선비가 거절하는데도 억지로 나귀에 실어 주었다. 얼마후 그 선비는 탁지부 대신(현 기획 재정부 장관)을 지낸 이용익인데 그는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김갑순을 불러올려 봉세관 (지금의 국세청)의 관리로 임명하고 당시 서울의 물류 집산지인 마포나루 관리 세원으로 보냈다. 그 후 이용익의 후원으로 1900년 9월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로 관직에 등용된 후 다음해에 황제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의관이 되고 다시 봉세관으로 가서 충청남도의 토지를 관리하고 도조(세금)을 수납하였다.
그후 1902년 부여 군수가 된후 노성, 임천 군수를 거쳐 충청 감영에서 아전이 된지 7년만인 1906년 공주 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때 공주 출신 사대부들과 아전들이 “아무리 문벌이 깨진 세상이라 하나 관노 출신 따위에게 어찌 고개를 숙일 것인가”하며 파업하였으나 김갑순은 적절한 선물로 회유하였다. 그후 김화 군수에 이어 아산 군수로 있을때 한일 합병이 되자 이듬해인 1911년 관직을 사직하였다.
그리고는 김갑순은 그간 봉세관에서 얻은 지식과 친일 인사 및 총독부의 신임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재산 증식에 나섰다.
당시 식산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땅을 사기 시작했는데 (금융 기관을 이용한 최초의 땅 투기꾼) 봉세관에 있을때 알아둔 역토와 둔토를 사들이고 금강 주변을 매립하여 공주 시장을 조성한 후 200여 점포를 세놓고 황무지를 싸게 사서 개간하고 도로및 수리 사업을 해서 땅을 넓히고 그 땅에서 받는 도조로 계속 토지를 매입해 나갔다.
그리고 1913년 충남 토지 조사 위원으로 위촉되어 총독부에서 토지 등기부 등본을 작성할때 소유가 불분명한 땅을 취득하는가 하면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공주, 대전등 충청지역 도로 개설 공사에도 참여하여 도로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그 외 자동차 운송 사업과 전기사업, 신문사 운영, 해동은행 주주등 각종 사업에 참여함은 물론 극장 개관 (1926년 논산, 1931년 대전, 1932년 공주)과 목욕탕 신설 (1926년 공주 논산)등 돈버는 업종은 가리지 않았다.
또한 김갑순은 온천욕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성에 승리관 (1917년 준공, 유성 관광 호텔, 2024년 3월 폐업)을 운영하면서 일본인 고관과 총독부 관리들의 접대 장소로 활용하였다.
당시 유성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봉명관 (현 계룡 스파텔 호텔)과 만년장 (호텔 리베라, 2018년 폐업)이 있었다.
특히 김갑순은 대전에 경부선이 통과 (1905년)하고 호남선 분기점이 되고 (1914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 (1932년)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전에 일본인과 총독부로 부터 알아낸 정보를 이용하여 미리 대전 지역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하여 놓았다. 당시 그가 소유했던 대전 지역의 땅은 대전 전체 면적의 40%인22만평이나 되었는데 그때 총독부에서 도청 건립 부지를 확보치 못하자 김갑순은 자기땅 1만 1,600여평을 희사 (일설에는 평당 4전씩 헐값 매도)하였는데 이로 인해 도청 주변인 대전 중심지의 논, 밭이 대지로 변경되어 1~2전 주고 산 땅이 100원대로 폭등하였다고 한다.
한편 김갑순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총독부와 충남도의 고위층과의 유대를 위해 총독부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3회) 충남도 평의회 의원 (4회)등 각종 직위를 유지하는 한편 여러 친일 단체의 회장이나 고문 등으로 참여하고 거금을 희사하여 총독부로부터 수차 표창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를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저리 대출과 세금 감면등 각종 혜택을 받았다.
그리하여 1930년대 말 그의 토지는 1,011만평 (여의도의 14배, 임야 제외)이고 공주 지역에는 소작인이 2,000여명이나 되고 마름 (소작인 관리자)이 40여명이 되었다. 그는 1930년 이전에 만석군이 되었고 그 이후에 2만석군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3대 부자인 경주 최씨 부자가 3천석을 한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제시 조선의 제일 땅부자로 “공주와 대전에서는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돌아 다닐수 없고 김갑순이 서울 갈때는 절반은 자기땅을, 절반은 남의 땅을 밟고 다녔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당대에 조선 갑부가 된 김갑순은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한글과 한문을 깨우쳤으며 그의 본래 이름은 김순갑이었으나 1920년 처음으로 군수 부여 발령을 받고 고종 황제를 알현케 되었는데 그때 고종이 김갑순이라는 이름을 하사 하였다는 내용이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공로자 연감” (1935 년 총독부 발행)에는 그의 본적은 공주시 반죽동 245번지, 종교는 불교, 취미는 성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살던 공주시 반죽동 257번지 (현 청소년 복지 시설)에는 “김갑순 집터”라고 새긴 작은 표지석이 있다.
또한 김갑순의 유별난 친일 사상은 그가 23세때 동학 혁명군들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에 대한 절대적 신봉 정신이 박혔다 하며 한일 합방 후에는 이완용, 윤치호등 친일파와 사돈을 맺고 일본인과의 친분 쌓기에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한다.
특히 총독부 관리나 영향력 있는 일본인에게는 금으로 만든 명함을 제공하는가 하면 그의 아들이 판사 시험에 낙방하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공예품을 선물하여 판사가 되었다 하여 “호피 판사”라는 말이 생겼다 한다.
그러나 김갑순은 사또의 요강 닦는 관노에서 출발하여 그 어렵다는 군수를 무려 6개 지방에서 하고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되었으나 당대에 몰락의 길을 걸었는데 1945년 해방 후 친일 반 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결국 1949년 친일 반역자로 체포되었으나 당시 어수선한 정치 상황과 공소 시효 만료로 석방되었으며 그는 명예회복을 위해 1950년 실시된 제 2대 민의원 선거에 아들과 손자를 공주 갑, 을 선거구와 유성 선거구에 출마 시켰으나 낙선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에게 지주 학살 대상자로 체포되었으나 당시 인민 재판을 주관하던 인민군 장교가 김갑순 머슴의 아들이었던 관계로 목숨을 구했다 한다.
그는 부인 단양 우씨와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고 (첩이 10명이라는 설도 있음) 직계 자손만도 80여명이나 된다하며 그는 평생 공주 반죽동 집에서 살았는데 경옥고 끓이는 냄새가 온동네 퍼지고 하인들은 경옥고 간보는 재미로 밤새워 불을 지폈다 한다. 이렇게 부귀 영화를 누리던 김갑순은 토지 개혁 (1949년) 과 화폐 개혁 (1953년)으로 거의 몰수되어 그가 사망후 부과된 상속세 2,400만원을 내지 못하여 자손들이 현물 (대지 7,000평, 전답 4,000평, 임야 184만평, 주택 721동)로 대납하였다 한다.
그는 1960년 8월 16일 인절미를 먹다 목에 걸려 89세때 숨졌는데 세간에는 김갑순은 인복, 관복, 재복, 장수복과 죽을 복까지 타고난 사람이라 일컫었으며 그의 묘는 당대 발복지 (금계 포관형)라는 그의 선친묘가 있는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산 72번지 인근에 있었으나 2020년 인접한 그의 어머니 묘옆에 조성된 가족묘로 이장되었다.
현재는 그의 선친의 묘자리, 국밥집과 생가터등에 대한 풍수와 매입 경위등이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을뿐 그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그가 말년에는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데 1982년 MBC에서 방영한 거부 실록 시리즈에서 이말이 방송되어 한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는데 그는 돈만 쫒던 부나비 같은 인생을 살았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