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1일은 우리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한가위 유래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때 (서기 32년) 남자들은 무예 경연을 하고 여인들은 길쌈 대회를 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가무 관현을 즐기면서 8월 보름절 3일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석이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서의 중추절, 중추 월석등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한가위는 삼국사기등에 한가위, 가배절, 가위날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위는 신라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것으로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가 합친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한가위는 오곡 백과가 무르익는 8월 (음력)의 만월을 기하여 조상에게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이 모여 경연과 가무를 즐겼던 민속절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은 뜻깊은 한가위를 앞두고는 옛날부터 조상묘를 벌초하고 마을길과 집안밖을 청소하는가 하면 각종 놀이와 경연 준비도 하는등 그 정성도 대단했답니다.
즉, 각마을에서는 마을 안밖길과 마당마다 새로운 황토흙으로 돋구어 동리를 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연기에 그을린 부엌은 논흙 물칠을 하여 단장하고 방고래를 수리한 후 방바닥에는 창호지를 겹겹히 바르고 그위에 콩땜을 하여 노랗게 하였으며 남은 콩땜은 마루와 기둥에 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방마다 도배를 새로하고 문짝마다 새창호지를 발라 탱탱하게 말리고 문짝 손잡이 부근에는 국화와 코스모스등의 꽃과 잎을 창호지 사이에 넣어 수를 놓기도 하였지요.
이런 중에 가장 기대했던 것은 추석빔이라 생각됩니다. 동리 아이들은 대목장에 가신 어머니를 동구밖까지 마중가서 새옷과 신발을 받아 안고 단숨에 집에와서 새옷을 입어보고 신발을 머리맡에 놓고 자기도 했지요.
그리고 이때쯤이면 객지로 돈벌러 갔던 누나와 형들은 사과 한 바구니와 정종 한병은 필수고 부모님 내복과 동생들 옷을 사가지고 와서 더러는 서울말을 써가며, 가족과 함께 부침개와 송편을 빗는가 하면 햇솔잎을 따오고 밤 (생율)을 치는등 제사준비를 하였지요.
정작 추석날 아침에는 추석빔으로 옷을 갈아입고 햇곡식과 과일로 제사를 지내고 부모님 따라 성묘를 하였지요.
추석 저녁에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 동네 대항 씨름을 하고 추석때만 되면 어김없이 읍내 장터에서는 서커스, 씨름대회가 열리고 극장에서는 악극단이 공연되었지요.
서커스 구경갔다 훈육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학부형 대신 하숙집 주인을 모시고 갔던 이야기며 동네 청년들의 호위(?)하에 동리 처녀들이 단체 관람을 하러 달빛에 이삼 십리길을 오가며 소문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때 악극단의 인기는 대단했지요. 당시 임춘앵 (1923~1975) 극단을 비롯하여 아랑국극단, 랑랑국극단 공연을 본 시골 총각들은 틈틈이 연습을 하여 추석절에 대청 마루가 있는 집에서 공연도 하였지요.
그리고 뒤이어 인기를 끈 악극단 (가요, 밴드, 코메디등)은 동리 청년들이 마을마다 “추석 콩쿨 대회”를 개최하게 하였지요.
이렇게 추석절이면 많은 사람이 내왕하고 볼거리가 많아지자 시골에도 “연애”라는 말이 생기고 동네 혼인도 생기기 시작하였답니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뭐니뭐니해도 최대행사는 당시 국민학교 “운동회”였지요. 운동장엔 만국기가 휘날리고 용진문과 개선문을 앞에 두고 청군과 백군 (처음에는 청군, 홍군)이 갈라 앉자 큰 북소리에 맞추어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을 높여 응원하고, 점심 시간에는 이마을 저마을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햇콩밥, 송편, 고구마, 햇과일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겼지요.
이렇게 즐거웠던 한가위가 지나고 나면, 우물가에선 아주머니들이 아무게는 이번에 와서 돼지를 사라고, 누구는 송아지를 사라고 돈을 놓고 갔다느니, 누구는 누구와 내년 봄에 결혼식을 올린다느니 수다를 떨기도 하였지요.
이렇게 정겹던 고향은 그간 급격한 산전벽해의 변화로 고향 주민들은 자식따라 생업따라, 형편따라 집을 옮겨 다니다 보니 서로 안부도 모르는 처지가 되었지요.
몇년전 미국으로 이민간 대학 친구를 만났는데 고향에 가보니 생가가 있던 동리는 포장도로로 변했고 선영이 있던 뒷동산에는 공장이 들어 섰으며, 모교는 요양병원이 되어 있고, 인근에 민가도 없어 말한마디 건네 보지도 못하고 돌이 왔다면서 그간 “그래도 고향에는 선산이 있고 내 뭍힐곳이 있겠지..”하고 생각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더라고요. 저는 그 친구에게 소장하고 있던 금강 상류의 수석 한개를 주었더니 고마워하며 가던 그 친구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끝으로 제가 이렇게 아련히 더듬어본 추억의 글에 동감하는 이도 점점 줄어들어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의 이야기가 되고 그나마 남은 한가위의 잔상도 코로나 19로 지워질것 같아 안타까움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