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겨울 긴 밤을 보내면서 어린 그 시절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춥고 눈도 많이 오고 밤이 길었는지 아련한 그때를 회상해 봅니다. 이럴때면 먼저 읇조리는 것이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설은 타향에/ 외로운 맘 그지 없이/ 나홀로 서러워…”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미국의 민요로 원 제목은 “Dreaming of Home and Mother”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 고향을 떠난 독립 운동가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으로 불렀고, 6.25 전쟁때에는 피난민들의 망향가로 불리우고, 해외 이주민의 모임에서는 단골 합창가였던 노래로, 이는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에 딱 맞는 그런 노래입니다. 이렇듯 고향집은 언제 어디서든 생각만 하여도 정겨웁고 가슴 뭉클해지는 곳입니다.
어린 시절 고향의 그 겨울에는 소리없이 내리던 눈이 해가 질 무렵 그치고 어둠이 깔리면 옹기종기 맞다은 초가 지붕위에는 흰눈이 소복히 쌓이고 굴뚝에서는 저녁연기가 피어나는 평화스런 농촌 마을이였습니다.
저희 고향은 시골 양지바른 나즈막한 산밑에 남향으로 열 서너댓 집이 네것 내것없이, 내일 네일을 가리지 않고 이웃 사촌처럼 정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동네 가운데는 매 방앗간 (연자 방앗간)이 있고, 공동 우물 두어개와 정자 나무가 있었습니다.
저희집 뒤에는 대나무 울타리 속에 납작 감나무와 월하 감나무가 있고 장독대 옆에는 석류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일꾼들이 잘 추린 짚단을 들고 사랑방에 모여들어 산내끼 (새끼)도 꼬고 삼태기도 만들고 한켠에서는 구성진 소리로 춘향전등 옛날 이야기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이럴때쯤이면 이웃집들에서 시루떡, 고구마, 생두부등을 가져와 동치미 국물과 김치를 곁들여 밤참을 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먼데 개짓는 소리 사라지고 달빛이 굴뚝 그림자를 드리울때면 사랑방 불도 꺼졌습니다.
우리집 부지런한 일꾼 아저씨는 새벽에 일어나 쇠죽을 끓여 외양간 구수 (구유)에 담으면 무럭 무럭 김이나고 쇠죽을 먹는 소의 워낭 방울 소리가 아침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일꾼 아저씨는 부엌 큰솥에 물을 끓인 다음 앞 뒷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는 넉가래로 동네길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햇빛이 나면 고드름이 주렁 주렁 달린 양지바른 추녀밑에 모여들어 동네 이야기도 나누고 고드름과 눈으로 장난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신 동네 사랑방에서는 여름에 칡 넝쿨을 삶아 껍데기를 벗겨내고 하얀 속껍질로 논넷기(노끈)을 꼬고 왕골 자리를 만드는 고두래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 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할아버지 옆에서는 할머니가 홍수감 (홍시)과 식혜를 자시고 하라고 독촉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어른들이 드시던 식혜(감주)는 붉은 고추와 생강을 넣어 아이들이 훔쳐 (?)먹지 못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안방 벽장 (다락)은 왜 그리 높았는지 내가 엎드리면 누나가 등을 밟고 올라가 콩강정이나 깨강정을 꺼내 먹기도 하고 통가리에서 고구마를 꺼내다가 화로불에 묻어놓고 불수저로 다독거리고 부젓가락으로 찍어내어 먹었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옛 고향집에서 빼놓을수 없는것이 헛간과 광 (토광, 곳간)이 있습니다. 헛간은 주로 남자들이 드나든다면 광은 주로 여인네들이 출입하였습니다.
헛간에는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실때 들고 다니시던 살포며 가마니, 멍석, 삿갓, 메꾸리 (멱둥구리), 도랭이, 바지게, 각종낫, 호미, 쇠시랑, 쟁기, 가래, 그리고 풍구, 호롱기 (탈곡기), 물레, 베틀등 온갖 농기구와 잡동사니가 있는가 하면 소에 필요한 소덕석, 쇠신, 코뚜레, 멍에등이 있는 만물 창고였습니다.
한편 광에는 용수 박아놓은 술도가지며 왕겨가 담겨진 소쿠리속에는 사과등 과일이 있고 밀가루가 든 장독속에는 곶감이, 시렁위에 있는 메꾸리와 광주리 속에는 제수 용품과 누룩, 김, 미역, 명태, 피딩어, 호박 꼬지, 시래기등 마른 먹거리가 담겨져 있고 오쟁이에는 각가지 곡식 씨앗이 보관되어 있으며 벽에는 각종 크고 작은 얼김이 (채망), 치 (키)등이 걸려 있었습니다.
특히 광은 토광신이라 해서 고사를 지낼 정도로 신성시 되기도 했고 “ 그 집안을 알려면 광을 가보면 안다”든지 “광에서 인심난다”는 등의 속담이 있는가 하면 그집 며느리가 광 열쇠를 시어머니로 부터 물려 받아야 진짜 주인 마님이 된다고 할 정도로 광의 존재는 대단했습니다.
이러한 농촌 고향 마을을 회상하자니 그때 사람들의 얼굴이 문득 문득 생각이 나고 그들과의 추억이 밀려 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겨울 긴밤 보내면서 옛추억은 물론 잊고 지내온 은인들에 대한 감사와 잘못한 일에 대한 회개의 시간도 가져 보기 바랍니다.
끝으로 “고향집” 제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산기슭 돌아나온 바람이 머무는 곳/ 고향은 거기에 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두룬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들판에서 소를 몰며 지게에 노을을 짊어진 아버지가 한걸음 한걸음 돌아오던 곳/ 거기에 고향집이 있었다/ 친구와 낮엔 고기잡아 천렵하고 밤엔 참외 서리 하던곳/ 누나의 손톱에 빠알간 봉선화 물이 들던 곳 / (중략) 그곳에 고향이 있다/ 텃밭 마구 파헤친 닭 버릇 고쳐 주겠다며 멍멍이 정신없이 종일 쫓아 다니고/ (중략) 겨울엔 화롯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눈곳/ 그 편안함, 따뜻함, 그리움, 추억, 가족, 친구들…/바람과 시간이 머물던 곳/ 고향집은 거기에 있었다/ 가고 싶은 내 고향을 꿈속에 그려 본다.